일제침탈 반발 '낙향', 후학 양성 통해 민족정신 함양 기여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민속마을에 있는 참판댁. 퇴호 이정렬 선생이 고종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가옥이다. 아산시 제공.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민속마을에 있는 참판댁. 퇴호 이정렬 선생이 고종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가옥이다. 아산시 제공.

[아산=안성원 기자] 일제가 대한제국에 통상조약과 사법권 이양을 강제 요구한 1900년대 초. 강직한 선비정신으로 등장한 한 문신(文臣)이 있었다. 그는 외부대신(현 외교부장관) 탄핵을 주장하는 상소를 수 십번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하고 낙향했다. 이후 여생을 고향에서 은둔하며 항일운동에 기여하며 지냈다.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민속마을 참판댁(국가민속문화재 제195호) 주인인 퇴호 이정렬(李貞烈, 1865~1950) 선생 이야기다. 퇴호를 아꼈던 고종 황제는, 그의 가르침을 받았던 아들 영친왕(英親王)에게 명해 퇴호거사(退湖居士; 강호에 물러나 벼슬을 지내지 않는 선비)라는 호와 ‘일심사군(一心事君; 한 마음으로 임금을 섬긴다)이라는 글을 직접 써 내리기도 했다. 

고종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복직을 명령했지만, 퇴호는 끝까지 고사한다. 퇴호는 고종의 하사품과 전(錢)도 여러 번 돌려보냈다. 그러자 고종은 집을 지어주면 뜯어버리진 못할 것이라고 여겨 창덕궁의 낙선재를 본떠 지금의 참판댁을 지어줬다고 한다. 이조참판을 지낸 퇴호의 직책을 따 참판댁이라는 택호(宅號)가 붙었다.

재밌는 사실은 퇴호가 실제로 참판직(參判職)을 지낸 적은 없다는 점이다. 그가 조정에서 활동한 시기에는 갑오개혁을 통해 관제가 개편돼 참판직은 사라진 상태였다. 하지만 같은 지위의 종2품 궁내부특진관을 역임했던 퇴호의 이력 때문에 그의 택호를 참판댁으로 부르게 됐다고 한다. 

‘거꾸로 말 타 등불 들고 입장’ 목숨 건 시위
일제침탈 반발 낙향, 고종 ‘퇴호거사’ 하사

퇴호 이정렬 선생 초상. 일제의 침략에 반발해 고향인 송악으로 귀향해 지역의 항일 민중정신 고취에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아산외암마을 참판댁 유물도록.
퇴호 이정렬 선생 초상. 일제의 침략에 반발해 고향인 송악으로 귀향해 지역의 항일 민중정신 고취에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아산시 외암마을 참판댁 유물도록.

퇴호는 1868년(고종 5년) 8월 2일 충북 보은군외속리면 구인리에서 태어나 10살 때 외암 이간의 5대손이자 명성황후의 이제(姨弟; 외가형제)인 이상규의 양자로 입적한다. 즉, 퇴호는 명성황후의 이종 조카가 됐다. 

퇴호가 12세 되던 해 할머니와 궁에 방문했을 때, 명성황후는 “학업에 힘써 임금을 보필하라”고 말했고, 16세 혼인 때는 직접 비단옷을 하사했다. 이로 인해 퇴호는 19세 때 돈녕부참봉에 임명되지만, 생부 사망으로 3년간 ‘시묘살이’로 관직을 그만 둔다.

이정렬이 본격적으로 출사해 조정에서 활약한 것은 1891년(고종 28)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면서부터였다. 성리학적 이념과 글솜씨를 인정받았던 만큼 왕을 가까이 보좌하는 근시 및 교육과 관련된 업무를 주로 담당했다. 비서원승(秘書院丞)과 영친왕을 가르치는 시독관(侍讀官), 규장각직학(奎章閣直學) 등을 역임했다. 영친왕을 가르칠 때 사용한 교재 동몽선습(童蒙先習)은 현재 참판댁 유물로 남아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퇴호는 일제의 강제 통상조약을 강하게 반대했다. 일제 침략을 저지해야 한다는 상소를 20번 넘게 올렸지만 효과가 없자 최후의 방법을 강행한다. 고종이 참석한 아침 조회에 등불을 들고 말을 거꾸로 탄 채 출근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죽음을 각오한 엄청난 불경으로, 퇴호는 수위가 입구에서 저지하는 걸 뿌리치고 조회 장소까지 들어갔다.

퇴호는 “나라가 그믐 밤중처럼 깜깜해 등불을 들었다”고 밝혔다. 그가 말을 거꾸로 탄 이유는 정면으로 들어가면 임금의 호위병들이 칼을 내리칠 때 무의식적으로 칼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자리에서 임금이 목을 치면 칼을 맞아 죽겠다는 각오에 따른 선택이었다. 

이 같은 퇴호의 강직함을 두고 황성신문은 연 3일 ‘조선에도 봉황이 울었으니 아침 햇볕이 내리 쬐일 것이다’라고 찬탄하기도 했다.

칠은계, 항일 민중운동 고취 시킨 거점 역할
고종 인산일 이후 일제 요주시찰 당하기도

영친왕이 직접 써서 내린 '퇴호거사(退湖居士)'라는 호와 ‘일심사군(一心事君)' 현판 모습. 아산시 외암마을 참판댁 유물도록.
영친왕이 직접 써서 내린 '퇴호거사(退湖居士)'라는 호와 ‘일심사군(一心事君)' 현판 모습. 아산시 외암마을 참판댁 유물도록.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퇴호는 정치에 개입하는 대신 낙향을 선택했다. 고향에서 후손을 교육시키고 일제의 방침에 반발하는 방식을 취했다. 신식학문과 머리 자르는 것, 일제의 벼슬을 금지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자손뿐 아니라 돈이 없어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도 교육했는데, 교육 방식이 매우 엄했다. 조금의 잘못도 반성하도록 했고 매질도 서슴지 않았다. 

1902년 촉나라의 도원결의를 본떠 동지들과 칠은계(七隱契)를 만든다. 구성원은 퇴호를 비롯해 이주상(李冑相), 이진상(李晉相), 조희동(趙熙東), 윤필(尹泌), 안숙(安淑), 정인호(鄭仁好) 등이다. 표면상 유유자적 봄을 즐기고 시를 짓는다는 의도로 조직됐지만, 근본적으로는 뜻이 맞는 인사들이 모여 나라를 걱정하고 일제 침략을 막을 계책을 도모하는 성격의 모임이었다.

계원들은 이후 1918년 고종이 승하하자 단종의 칠의신(七義臣)을 따라 칠은사(七隱社)를 건립한다. 일제 때는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폭정과 만행에 대해 무언의 시위를 하는 등 송악면 일대의 항일 민중의식을 높인 중심지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송악면 유곡리 사당에 7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봄마다 후손들이 제를 올리고 있다.

퇴호는 1910년 7월 13일 한일합방 소식을 접하고 산에 올라 종일 통곡하고, 일체 두문불출한 채 병이 들어도 약을 물리칠 정도였다. 국가의 위기와 어려움에 얼마나 간절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1919년 고종황제의 인산일(장례식)에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제술관에 임명되지만 “매국에 일조한 적신(賊臣)과 함께할 수 없다”며 곡만 올린다. 

일제는 고종 인산일에 민중의 소요가 있자, 평소 고종과 친밀한 퇴호를 주요 인물로 시찰한다. 일본 헌병이 찾아와 적극 회유 하려 하자 “먼저 이 칼(헌병이 찬)로 너의 목을 친다면 마음이 조금 편해질 것 같다”고 엄포를 놓거나, 1923년 일제의 충남 참여관(현 정무부지사) 권고에 “다시 찾으면 자결하겠다”고 경고한 일화는 일제를 향한 퇴호의 저항정신을 엿볼 수 있다. 

퇴호는 고종 승하 이후 산에 올라 통곡하다가 몇 그릇의 피를 토한 이후 건강을 잃었다고 알려졌다. 이후 그는 1950년 2월 27일 8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퇴호의 대표적 문집으로는 ‘퇴호유고(退湖遺稿)’가 있으며, 초본, 필사본, 석인본 등 3종이 현재 참판댁에 전해진다. 이외에도 참판댁에는 퇴호의 저작이 다수 전해지고 있다.  

 

<이 글은 아산시와 함께하는 ‘아산 외암마을 참판댁 소장유물 홍보 캠페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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