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출산과 저출생’은 왜 정치공방의 소재가 됐나

[김재중 기자] 대전시의회 복지환경위원회가 조례에 담긴 ‘저출산’이라는 표현을 ‘저출생’으로 변경시키는 조례개정안을 부결시키면서, 여야간 ‘아바타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조례개정을 주도한 더불어민주당은 조례안 부결에 나선 국민의힘을 향해 “누군가의 ‘아바타’가 돼 스스로 거수기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공세를 펼쳤고, 국민의힘은 “유독 민주당과 일부 단체만 ‘저출생’이라는 단어만을 고집하니 그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며 “민주당이야말로 누군가의 진정한 아바타 아니냐”고 응수했다.

사실 대전시의원 22명 중 더불어민주당 4명, 국민의힘 11명 등 시의원 15명이 공동발의한 조례개정안이 부결되는 상황을 쉽게 이해하기란 어렵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이른바 ‘품앗이 공동발의’에 참여했지만, 나중에 무게추가 부결 쪽으로 기울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저출산’과 ‘저출생’이 어떤 함의를 지니고 있기에 이처럼 정치공방의 소재가 되었을까.

‘저출산’이라는 용어를 ‘저출생’으로 바꾸자는 시각은 ‘저출산’이 15~49세 가임 여성이 평생 낳을 수 있는 출생아 수를 의미하는 것이기에, 인구문제를 여성에 전가하기 위한 차별적 언어라고 바라보고 있다. 양성평등의 관점에서 인구 1000명 당 출생아 수를 기반으로 하는 ‘저출생’이라는 용어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 이번 조례개정의 핵심 이유다.

차별적 언어를 바로잡겠다는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나. 과거 우리사회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라는 말을 무심코 ‘장애인과 정상인’이라는 식으로 사용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나 ‘정상인’이라는 말은 장애인을 ‘비정상’이라고 인식시키는 차별적 언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그런 표현을 삼가는 분위기가 정착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시절 장애인단체 행사에 참석해 ‘정상인’이라는 말을 썼다가 홍역을 치른 사례도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저출산’이라는 용어를 ‘저출생’으로 바로잡는 것에 인색한 것이 사실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좀 더 적극적으로 법안 개정이나 자치단체 조례개정에 나서면서 국민의힘이 여기에 대한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다. 여기엔 20∼30 젊은 남성보수가 ‘여성주의’를 향해 쏟아내고 있는 혐오, 이른바 젠더갈등까지 녹아 들어가 있다.

국회에서도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을 ‘저출생‧고령사회기본법’으로 개정하려는 노력이 지난 20대부터 줄곧 이어져 오고 있지만, 법 개정의 시급성이 없다는 이유로 계류 후 폐기됐거나 계속 계류 중인 상황이다.

박광온 더불어민주당 의원 역시 지난 4월 13일 개정안을 발의하면서 “현행법이 사용하고 있는 ‘저출산’은 가임 여성 또는 산모 중심의 용어로 ‘여성이 아이를 적게 낳음’이라는 뜻”이라며 “인구문제의 책임이 여성에게만 있는 것으로 오인될 소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여기서 눈 여겨 볼 대목이 하나 있다. 지방자치단체 조례를 개정하면서 ‘저출산이냐 저출생이냐’는 논란이 처음부터 큰 걸림돌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전국 자치단체 조례와 규칙 등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자치법규정보시스템’을 통해 ‘저출생’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이미 상당수 자치단체가 여러 조례와 규칙 등에 ‘저출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해당 자치단체 중에는 서울과 경기도는 물론이고 이른바 ‘보수의 아성’으로 인식되고 있는 경남과 경북, 이 지역 기초단체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국민의힘 대전시당이 논평을 통해 “유독 우리나라에서 그것도 민주당과 일부 단체에서만 ‘저출생’이라는 단어만을 고집하니 그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은 사실관계에 부합하지 않는 셈이다.

단적으로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을 지낸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은 이달 초 국민의힘 소속 충남도의원들을 상대로 한 특강에서 “지역균형발전이 절실한 것은 저출생 고령화 때문”이라고 ‘저출생’ 용어를 사용했다.

<시사오늘> 보도에 따르면, 안 의원은 지난 18일 국회에서 개최한 ‘안철수의 10년 언론인 간담회’에서도 균형발전 필요성으로 ‘저출생 고령화 문제’를 다시 언급하며 “저출산이 아니라 저출생이라는 표현을 쓰는 게 맞다”고 언급했다.

국민의힘 소속 안철수 의원이 이처럼 용어를 정의했다면, 정파적 이해를 뛰어 넘을 필요성을 인정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국민의힘 소속 대전시의원들에게 안철수 의원 정도의 ‘인식 전환’을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동료 의원 발의 조례안에 ‘품앗이 서명’을 하더라도, 조례안 취지가 무엇인지 정도는 살펴보고 동의할 수 있는 경우에만 이름을 올리시길 바란다.

정치인의 정치적 소신을 탓할 바 아니지만, 이미 서명한 뒤에야 ‘없던 정치적 소신’을 만들어 자기부정을 하는 코미디 같은 정치를 시민들은 납득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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