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창호의 허튼소리] 수필가, 한국시와 소리마당 자문위원

나창호 수필가.
나창호 수필가.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죽을지는 몰라도 반드시 죽는다. 이는 인간의 숙명이다. 날 때는 순서가 있어도 갈 때는 순서가 없다고도 한다. 어린 나이에 병을 앓다가 죽을 수도 있고, 젊은 나이에 사고로 죽을 수도 있어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간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거나 삼가왔다. 죽음을 거론하는 것이 유쾌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년에 이르면 다르다. 필자는 술자리에서나 몇몇이 같이하는 산행 길에서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하는 것을 수시로 보고 들었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죽을 때까지 스스로 움직이며 건강하게 살다가 죽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운동도 하고 산행도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옛 사람들이 이야기했던 와석종신이니 어쩌니 하는 말들과도 일맥상통한다할 수 있다. 사람이 천명을 다하고 제자리에 누워서 잠자듯이 죽는 것은 죽음의 복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이 누릴 수 있는 5복 중의 하나가 고종명考終命이라고하지 않던가. 누구나 그런 천수를 다한 후의 편안한 죽음을 선망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죽음의 복을 타고날 수는 없다. 평생을 건강하게 살다가 곱게 죽는 사람도 있지만, 병마로 고통을 받다가 애처로운 모습으로 죽는 사람도 있다. 또 뇌졸중이나 뇌출혈 등으로 자칫 의식이 없는 상태가 되거나, 거동을 못해 자식들에게 어려움만 안겨주다가 죽는 사람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상실한 흉한 모습이나, 보기가 험한 상태로 죽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노년에 들면 아름다운 죽음을 예약하는 사전준비가 필요하지 않을까싶다.

꽃들이 피기 시작한 지난 이른 봄으로 기억한다. 과거에 세계적인 미남배우로 명성을 날렸던 알랑들롱이 안락사를 택할 것이라고 해서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미남의 대명사로 불렸던 그도 나이가 들어 늙게 되자 심장병과 뇌졸중 수술을 받는 등 병고에 시달리고 있었던 모양인데 건강이 더 나빠지면 존엄사하겠다고 밝힌 것이었다. 프랑스인인 그는 존엄사가 법적으로 허용되는 스위스의 국적을 이미 취득해서 이중국적자가 되었으며, 스위스에 머물고 있었다한다. 그런데 알랑들롱이 말한 존엄사는 인위적으로 생명을 단축하는 적극적인 존엄사, 즉 안락사安樂死를 말하는 것이다. 아마도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편안한 병상에서 의사가 깊은 잠에 빠져들게 하는 수면제와 숨을 거두게 하는 약물을 함께 처방해 주사하는 방식이지 싶다. 환자가 어느 정도 의식이 있다면 경구로 투여케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나라에도 생명을 단축하는 적극적인 존엄사는 아니라도 소극적인 존엄사제도가 있다. “회복이 불가능한 환자가 원하지 않으면 연명의료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연명의료결정법이 2018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회복이 불가능하면 인공호흡기 같은 연명의료장치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물론 본인이 그 뜻을 밝히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해서 관계기관에 미리 등록해 놓아야 한다. 필자도 신분증과 운전면허증, 신용카드를 넣고 다니는 작은 손지갑에 카드 하나를 추가해서 넣고 다닌다. 바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증이다. 꼭 신용카드 크기만 하다.

신청한지 한 달여가 지나자 “당신의 결정을 존중합니다.”라는 문구가 쓰인 우편물이 왔다. 등록증이 들어 있는 우편물 속에는 “사람들은 겨우살이는 준비하면서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는 톨스토이의 말이 쓰여 있었다. “죽음을 맞이하기 이전에 삶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개인적으로 매우 큰 불행일 것”이라는 권유인지 경고인지의 문구도 적혀 있었다. 필자는 ‘이는 스스로 품위 있게 죽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하는 좋은 제도’라고 생각한다.

만약의 경우 의식이 없는 상태로 인공호흡기를 단채 수년 또는 수십 년을 누워있다면 진정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팔다리는 근육이 소실돼 마른 장작 같고, 얼굴은 움푹 파인 괴상한 모습으로 숨을 겨우 쉬고 있다면 본인은 물론 지켜보는 가족들의 고통도 극심하지 않을까. 개인적이나 사회적 비용 또한 엄청나지 않을까.

따라서 이런 지경까지 가기 전에 본인이 미리 의사결정을 해놓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지 싶다. 필자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제도가 사회에 점차 알려지면서 이를 등록을 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날 것으로 본다. 친구나 주위 지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등록하겠다는 말에서도 이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죽음에 관한 문제인 만큼 본인 스스로 결정해야할 일이다. 필자도 등록증을 받고나서 집사람에게 이를 알려주었을 뿐 등록을 권하지는 않았다. 삶의 몫도 죽음에 대한 몫도 본인이 알아서 챙기고 결정해야할 일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디트NEWS24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