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조한필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 박문수 연구 논문 3편 연속 발표

조한필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이 올해에만 암행어사 박문수와 관련된 3편의 논문을 발표해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묘소가 천안에 있고, 시골집이 공주에 있는 박문수는 충남의 인물"이라며 관련된 역사문화 콘텐츠 발굴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안성원 기자.   
조한필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이 올해에만 암행어사 박문수와 관련된 3편의 논문을 발표해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묘소가 천안에 있고, 시골집이 공주에 있는 박문수는 충남의 인물"이라며 관련된 역사문화 콘텐츠 발굴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안성원 기자.   

[안성원 기자] “대학시절엔 역사학자를 꿈꾸었고, 35년 언론에 몸담을 땐 충남의 역사와 인물에 대한 역사 관련 칼럼도 쓰면서 연구를 지속해왔어요. 그 중에서도 ‘암행어사 박문수’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조한필(62)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은 올해만 '어사 박문수' 관련  논문을 3편이나 발표하며 학계 주목을 받았다. 충남 천안시 은석산에 묻힌 박문수(1691~1756년)는 암행어사의 대명사로 불리며 많은 설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인물.

하지만 한 때 어느 TV예능프로그램에서 실제 암행어사가 아니라는 주장이 나오며 이력 논란이 불거진 바 있다. 조 원장의 논문은 이 같은 주장에 반박은 물론, 실제 암행감찰 활동을 입증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먼저 조 원장은 올해 4월 한국연구재단 등재지 ‘역사와 담론’ 98집에 실린 ‘조선 영조대 별견어사(別遣御史)의 성격’에서 박문수가 영조(1724~1776년)대에만 있던 '별견어사'로서 특별 명령을 받아 활동한 기록을 발표했다.  

논문에 따르면, 별견어사는 재해민 구휼 업무를 담당하는 일반 어사 역할과 함께 지방관리를 규찰하는 암행어사 역할까지 하도록 ‘특별히(別) 파견한(遣)’ 어사를 뜻한다. 영조는 집권 초기 박문수 등 측근 관리를 별견어사로 여러 번 파견했으며, 현장에서 파면 장계를 올릴 수 있는 특권을 부여했다.

‘승정원일기’에는 영남 별견어사에 임명된 박문수가 영조에게 “나중에 암행을 하면 제 몸집이 매우 커서 숨기가 어렵다”는 진언을 한 기록이 나온다. 또 박문수는 경상도 파견 당시 “전복을 어민에게 헐값으로 매입하는 지방수령들을 암행을 통해 장율(贓律·뇌물죄)로 다스리겠다”고 진언했다.  

조 원장은 또 지난 11월 ‘지방사와 지방문화’ 24-2호에 실린 논문 ‘박문수의 어사 이력과 별견어사 활동’에서 박문수가 37세 때인 1727년 영남별견어사로 파견된 일과, 직후인 1728년 3월 이인좌의 난을 진압해 당상관(堂上官) 영남관찰사로 파격적으로 승진한 사실도 밝혔다. 

최근에는 ‘어사 박문수, 공주의 삶 자취’(웅진문화 34호)를 통해 박문수가 20대 초반 조부와 부친 등의 묘를 옮기기 위해 충남 공주와 인연을 맺고, 벼슬길에 오른 30대 초반 공주로 이사한 뒤 30여 년의 관직생활 대부분을 공주에서 생활한 사실을 밝히기도 했다. 

천안에 묘소, 공주에 시골집 “박문수, 충남의 인물”
박문수 관련 역사문화 콘텐츠 발굴 필요한 이유

조 원장은 박문수의 강직함과 위민 관료로서의 활동에 대해 현대사회의 정치권과 공직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인물이라며 중요성을 주목하기도 했다. 
조 원장은 박문수의 강직함과 위민 관료로서의 활동에 대해 현대사회의 정치권과 공직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조 원장은 “학계에서 박문수가 암행어사로 임명되지 않은 사실을 두고 의문을 제기하고 있지만, 별견어사로서 암행어사보다 더 암행감찰 활동을 펼쳤다”며 “박문수의 철저한 비리 감찰, 백성과의 교감과 위민(爲民)적인 관료 활동이 그를 암행어사의 상징으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박문수는 별견어사 파견 때 울산부사, 영주군수, 경산현감 등 11명의 파직을 이끌었다. 임금의 측근이 추켜세운 양산군수 비리를 적발하거나, 이미 파직돼 유배간 청도군수를 다시 붙잡아 의금부 압송을 요구할 만큼 강직했다. 품성도 순박해 영조가 민심을 위로하는 일을 당부하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국민들의 신뢰 회복이 필요한 현대 정치권과 공직사회에 경종을 울릴 수 있는 인물이라는 얘기다. 

조 원장은 특히 “박문수는 흉년에 곳간을 열어 구휼미를 내놓거나 혼기가 찼음에도 가난으로 결혼하지 못하는 처녀·총각 지원을 주장하는 등 위민관료로 성장했다. 백성들에게 이런 모습이 각인돼 암행어사 관련 주요 설화의 주인공이 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박문수의 공주 집은 교동 공주여중 정문 부근에 있었고, 호적자료를 보면 아들을 비롯해 손자, 증손, 현손 등의 후대까지 공주 교동집은 유지됐다. 그런데 공주를 빛낸 인물임에도 시민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고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조 원장은 끝으로 “암행어사는 무궁무진한 관광콘텐츠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보물창고”라며 “박문수 묘가 천안에 있고, 또 공주에 시골집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됐으니 암행어사 설화의 주인공인 박문수를 역사문화자원으로 적극 활용할 방안을 찾아야 할 때”라고 힘줘 말했다. 

한편 조 원장은 대전중, 대전고를 거쳐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공주대 문화재보존과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뒤 중앙일보와 금강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백석대 겸임교수와 충남문화재단 이사, 천안박물관 운영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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