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후보, 민족운명에 대한 ‘비전’ 제시 왜 못하나

현 정치구도하 국민통합,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 우세

수필의 창시자가 ‘몽테뉴’라면,
‘권력’의 창시자는 ‘수필’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우리 정치, 국민앞에 너무도 ‘자유분방’

한기원 칼럼니스트
한기원 칼럼니스트

그러니까 나는 올 초부터 디트뉴스의 고정칼럼을 쓰고 있지만 사실 칼럼은 일상에 대한 ‘직관’이 아닌 ‘수필’에 가깝다고 느낀다.

왜냐면 그것이 정치가 됐든 사회현상이 됐든, 중앙이든 지방이든 나로서는 그저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시대를 바라보는 회한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조류’(潮流)의 현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얼마 전 대전시립미술관에서 전시중인 ‘시간의 온기’라는 주제의 뜨거운 도예작품을 만나고 왔다.
코로나 시대 인류의 소통이 사라진 현 시대에서 ‘인류의 감성과 관계’를 다시 이어줄 유일한 해답은 예술이라는 미술관측의 설명에 몹시 공감했다. 

도자기에 대한 작가들의 애정어린 시선과 그 굴곡진 사이사이의 열정을 내 안에 모래성처럼 쌓고 왔다.

‘시간의 온기’
작품속의 도자기는 말이 없었지만 무언가 옛일을 추억하고 있었다.
‘차라리 잊어 버릴까’ 하고 말하고 있는 듯 했다.
그것은 잊고 살아 온 ‘사랑’과 우리의 ‘역사’였지 않는가.

무릇‘모든 이의 모든 애증’에 대한 만행(萬行)을 웅변하고 있지 않는가.

김병연(金炳淵).
그는 일생 동안 삿갓을 쓰고 ‘만행’하였다 하여 그 이름보다 ‘김삿갓’ 또는 ‘김립’(金笠)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풍자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 역시 생전에 천하명산 금강산을 이웃집 다니듯 하면서 그 절승경개를 기발하고 생동감 넘치게 묘사한 시를 굴곡지게 많이 지었다. 

정처 없이 방랑의 길을 다니다 거들먹거리는 양반과 굶주리고 헐벗은 농민들의 참상을 보면서 울분과 연민의 정으로 괴로워하다가도 금강산에 들어가면 만 가지 시름을 잊고 그 아름다움을 자유분방하게 노래하지 않았던가.

“정처없이 떠도는 이 몸 또다시 가을을 맞아/벗들과 짝을 지어 약속한 절간 누각에 모였노라/작은 골짜기에 많은 사람들 오니 그 그림자로 시냇물 가리고 
옛 절엔 중이 없고 흰 구름만 떠돌고 있네”

현 정치권과 흡사한 ‘조류’(潮流)의 현상을 일찍 터득한 김삿갓의 예봉(銳鋒)이 빛나는 구절이 아닌가 싶다.
단지 ‘말’의 수사가 아닌 민중에 대한 ‘연민’이 흐르고 있지 않나 싶어서다.

어떤 선거든 선거전은 ‘말잔치’라고 하지만 최근 수많은 말이 수많은 유형으로 수많은 문제에 대해 형용되고 있다.

그야말로 ‘말의 성찬’이 되어 버린 대선 형국이다.
정치란 사회구성원을 통합시키는 일인데 현 우리의 정치구도에선 그 통합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우세하다.

흡사 해방전후 좌우의 진영패권주의의 복사판이라는 것이다.

이러면 안되지 않는가.
‘민족통합’ 없는 집권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민족통합’에 대한 고뇌가 실종된 ‘2030’의 지지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떤 분야든 국민들은 말잔치로 끝나는 그 어떤 것과 거짓과 술수가 판치는 그 어떤 것에 신물을 내고 있다. 

천하절경 대한민국을 마치 제 몸 돌보 듯 하는 위정자들처럼 ‘말’로만 하지 말고 제발, 진영말고 ‘민족운명’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 달라고 하는 것이 지상명령 아니던가.

정치인들은 이번 선거를 계기로 ‘말잔치’가 아닌 다시는 진보, 보수의 패권주의가 부활되지 않도록 온힘을 쏟아야 하지 않겠는가. 

과연 지도자를 자처하는 대선후보들은 우리 위대한 민족을 위한 진정한 ‘사랑노래’를 언제쯤 전해 줄 수 있을까.
필자는 여야후보 모두가 정치권이 모든 ‘불온’(不穩)의 진원지임을 자각하고 ‘시간의 온기’를 담아내길 기대한다.

제발 알량한 집권욕, ‘권력’에 눈이 멀어 국민들을 더 이상 이간질 하지 말고 민족앞에 대승적으로 내 안에 있는 굴곡진 삶부터 참회하고 그들 스스로의 빈 노트부터 채우길 바란다.

내년 3월 선거가 끝나기가 무섭게 승자들의 목소리는 커지고 움직임은 분주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민족이익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그것은 진지한 변화의 시작이 아니고 자리나눔의 ‘그들만의 잔치’에 머물기 때문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수필이 보통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과 견해를 쓴 것인데,
권력은 개인적인 이익과 오해의 결과물이지 않을까 감히 생각한다.

수필의 창시자가 ‘몽테뉴’라면 안타깝게도 엄격히 말해 ‘권력’의 창시자는 ‘수필’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정치는 자유분방하다.
몽테뉴는 자신의 사사로운 일들에 대한 생각을 매우 뛰어난 솜씨로 포착해 생생하고 인상적인 방식으로 기록했지만 단순히 자신의 사고와 체험을 ‘말’로,  정치적으로 집요하게 표현해 온 집단이 우리 ‘정치’였기 때문이다.

좌우 말고 그렇게 국민을 설득할 자신이 없는가.
좀 넓게 보고 갈 때 아닌가. ‘수필’을 쓰듯이.
 

저작권자 © 디트NEWS24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