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창호의 허튼소리] 전 충남도 부여부군수

나창호 수필가(전 충남도 부여부군수).
나창호 수필가(전 충남도 부여부군수).

벌써 가을이 깊어 졌나보다. 아파트 어린이 놀이터 느티나무 잎들이 붉스레  물들어가고 은행나무 잎들도 누르스름해지고 있다. 가을비 내린 뒤 아침저녁으로 찬 기운이 도는 것도 확연히 느껴진다. 하지만 아직은 한낮 늦더위의 기승도 만만치가 않다.  

엊그제는 옛 직장동료들과 모처럼 보문산 산행을 하는 날이었다. 날씨도 좋았다. 보문5거리에서 버스를 내려 약속 장소인 시내버스 정류장이 있는 육각정까지 가려고 마을안길을 걷다보니 주변 환경이 많이도 바뀌었다. 좁던 골목은 차가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넓은 도로가 뚫리고, 울긋불긋한 깃발이 꽂혀 있던 무속인의 집들과 대로변의 허술한 상가들도 그새 많이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 소규모 주차장과 소공원이 조성되어있어 보기에도 좋고 시원했다. 빈티 나던 마을이 부티 나는 마을로 변모되고 있었다.

걸음을 재촉하다보니 주황빛으로 물든 감들이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집이 나왔다. 원래는 골목길 안쪽에 있던 집인데, 대로변 집들이 철거되어 전망이 훤히 뚫리고 햇빛이 잘 드는 집으로 변해 있었다. 감이 참 많이도 달렸고, 거의 익었는데도 집주인은 감 딸 생각이 없는 모양인지 감을 딴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담장을 넘어온 나뭇가지에도 감들이 많이 달리고 서너 개의 붉은 홍시는 아침햇살을 받아 말갛게 보이는데, 곧 물러빠져 길바닥으로 떨어질 것만 같다. 손이 닿으면 하나 따먹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홍시가 너무 높이 매달려 있다.

나는 문득 60년대의 초등학교 시절, 항상 배가 고프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 이렇게 감이 익어 가면 누런 빛 도는 감부터 따서 울궈먹었었다. 어머니께서 단지에 소금 탄 물을 붓고 땡감을 담궈 두면 며칠이 안 돼 떫은맛이 사라지고 먹기 좋은 감이 됐던 것이다. 어린 시절의 감은 밥으로만 배를 채울 수 없던 때의 좋은 먹을거리였다.

하지만 매번 감을 울궈 먹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한창 클 때이기도 했지만 늘 배가 고팠다. 가을이 되면 또래들과 어울려 먹을 것을 찾아 들과 산으로 쏘다녔는데 홍시는 그중에 좋은 먹거리였다. 밤이나 대추를 따먹다 주인한테 들키면 된통 혼이 났지만, 밭둑에 서있는 감나무의 홍시를 따먹는 것은 주인들도 그리 혼내지를 않고 대부분 묵인을 해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홍시를 따먹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감나무들은 대부분 아름드리였고, 어린 눈으로 보는 나무는 무척이나 높았다. 운 좋게 손이 닿거나 가지를 휘어잡아 딸 수 있는 홍시도 가끔은 있었지만, 그런 홍시는 이미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먼저 본 사람이 따먹었던 터라 홍시는 손이 전혀 닿지 않는 높은 곳에 매달려있기 일쑤였다.

쪽빛 가을하늘 속
아스라이 멀던
빨간 점

돌팔매질 수십 번에
겨우 떨어뜨린
먹거리

어릴 적 추억이 떠올라 ‘홍시’라는 제목을 붙여 예전에 써놓은 자작시다. 작은 손으로 던졌던 돌팔매는 빗나가기 일쑤였고 어쩌다 맞혀 떨어뜨린 홍시도 땅에 닿자마자 박살나기 일쑤였다. 수많은 돌팔매 끝에 겨우 떨어뜨린 성한 홍시는 단순히 ‘익은 감’이 아니라 그야말로 소중한 ‘먹거리’였다. 그 작은 감을 친구들과 쪼개먹으면 그렇게 달고 맛이 있었지만 주린 배를 채우기에는 역부족이라서 여기저기 감나무를 찾아 헤매던 기억이 아련하다.

그런데 요즘은 먹고 살기가 넉넉해서 그런지 자기 집 마당에 있는 감도 따지 않고 있다. 더 있다가 서리를 맞혀 따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격세지감이 크다. 참 좋은 세상이 된 것 같다. 옛날처럼 먹을거리에 구애 받지 않고 배불리 먹는 것 만해도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요새 아이들은 홍시나 울군 감을 간식으로 먹지 않아도 될 만큼 먹을거리가 풍부하다. 참 행복한 아이들이다.

하지만 나는 또래들과 들판과 동네 앞뒤 산을 쏘다니던 어린 시절이 그립다. 자유롭게 뛰놀던 그 시절이 그립다. 높은 감나무 밑에서 돌팔매질 같이하던 옛 친구들이 그립다. 장구먹, 재번덕, 맘마골, 감나무골, 솔청산 등 어린 시절의 추억이 배인 시골 땅 이름들도 새록새록 그립다.

아파트에 장터가 열리면 혹시 바구니에 홍시를 담아놓고 파는 할머니나 아주머니가 없는지 돌아봐야겠다. 그런 홍시가 있다면 한 소쿠리 사다가 먹어봐야겠다. 옛날의 그 맛이 나는지 알아봐야겠다. 마트에서 사각박스에 넣어 파는 홍시 보다는 장터의 바구니 속 홍시가 더 옛 맛이 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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