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창호의 허튼소리]

나창호 수필가(전 충남 부여 부군수).
나창호 수필가(전 충남 부여 부군수).

8월의 마지막 날인 어제 오후, 성글은 갈대발처럼 내리는 비를 무릅쓰고 전등사 답사를 마친 후의 과음 탓으로 밤을 새고도 주기가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지만 친구네와 두 가족이 비교적 이른 아침을 먹고 교동도로 향했다. 연산군 유배지를 보기 위해서다. 초지대교를 건너 경기도 쪽 도로를 따라서갔다. 내비게이션이 그리 안내했기 때문이다. 북부 경기도의 도로사정이 그리 좋은 것만도 아니었지만 여행하는 몸들이라서 서둘 필요는 없었다. 마침내 왕복 4차선 강화대교를 건너 시가지 외곽도로를 따라 좀 더 직진해가니 강화도와 교동도를 연결하는 교동대교가 전방에 보인다. v자를 거꾸로 세운 모양의 높다란 주탑 두 개가 앞뒤로 멋지다.

다리 입구에 조금 못 미친 지점에 이르자 군인초소에서 실총을 멘 군인들이 두세 명 나오더니 차를 세운다. 뭔 일인가 하고 차창을 여니 “차량출입증 있느냐?”고 묻는다. 잠시 순간에 ‘혹시 군청이나 경찰서에 미리 입도(入島)신고를 하고 출입증을 발급받아야 교동도에 들어갈 수 있나?’하는 불안감이 스친다. 교동도 위 바다 건너가 바로 북한 땅이기 때문에 이러지 싶다. 
 
나는 “연산군 유배지를 답사하려는데 출입증을 어디서 발급받느냐?”고 되레 물었다. 군인들은 여기서 발급해준다면서 신분증을 보자고 한다. 발급받은 출입증을 차 앞 유리 밑에 놓고 출발하려는데, 나갈 때 꼭 반납하라고 주의를 준다. 잠시나마 들었던 낭패감이 사라지니 기분이 홀가분하다. 난생 처음 들어가려는 교동도를 예까지 와서 못 들어가나 하는 불안감이 해소됐기 때문이다. 왕복 2차선의 좁은 교동대교가 무척 길어 보인다.

다리를 건너 달리는 섬 시골길이 한가롭다. 길가로 보이는 밭둑의 수수들이 익어가며 고개를 숙이고 있고, 들판은 제법 누르스름한 정경 속에서 고요하다. 대교에서부터 5km 쯤을 가니 고구저수지가 나오는데 늦게 핀 붉고 흰 연꽃들이 크고 소담스럽다. 집사람과 친구네 아주머니가 탄성을 지른다. 차창을 열고 보노라니 희미한 연꽃향이 차안으로 스며든다. 저수지가 끝나는 곳에서 바로 앞의 삼거리 교통표지판을 보니 밤색바탕에 흰 글씨로 쓰인 연산군 유배지 표시와, 좌측 방향을 가리키는 화살표시가 나온다. 곧바로 좌회전 해 들어가니 ‘ㄱ자’진 코너가 나오는데 그 앞에서 또다시 낭패감에 빠졌다. ‘공사 중으로 차량출입 및 연산군 유배지 관람 금지’라는 붉은 글씨의 현수막이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멍한 기분이 들었다. 대전에서 어렵게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차를 세우고 걸어서라도 갔다 오기로 하고 진행방향인 좌측 전방을 보니 저쪽 끝자락에 차량들이 주차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우리도 차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데까지 들어가 보기로 했다. 차가 공사장 쪽으로 들어가는데도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공터에 차를 세우고 보니 주변에 차량들이 많이 주차해 있고, 무슨 공사인지 공사판이 한창이다. 차량은 주로 공사장 사람들이 타고 온 것 같았다. 

문득 저 위쪽에 연산군 유배지라 쓰인 세로 표지석이 보이고, 바로 옆에 초가집도 한 채 보인다. 저 집이 유배처인가하고 올라가는데, 정원공사 안내판이 서있다. 아마도 강화군에서 연산군 유배지를 배경으로 정원공사를 하는 모양이다. 표지석 뒤로 보이는 제법 높다란 산이 화개산이란다.

막상 바짝 다가가서 보니 3칸 초가집은 연산군 유배처가 아니라 ‘교동도유배문화관’이라는 현판이 기둥에 붙어 있다. 실내에 무슨 자료들이 있나하는 궁금증이 일었지만 문이 잠겨 있어 보지는 못했다. 

정작 연산군 유배처는 문화관 좌측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부엌 한 칸, 방 한 칸짜리 초가로 초라하게 조성돼 있었다. 구전을 근거로 위치를 짐작해 세운 구조물로 보였다. 집 둘레는 탱자나무 울타리- 현장은 상징적으로 앞쪽만 조성해 놓았다- 로 막아 놓았다. 위리안치였다. 그것도 부족해선지 출입문 앞에는 창을 치켜세운 병사 두 명이 지키고 있고, 병사 뒤쪽 초가 옆에는 연산군을 싣고 온 소달구지와 함거가 한 틀로 설치돼 있다. 또 이를 끌고 온 소의 모형까지 만들어 놓았다. 이 것들을 바라보고 서있자니 마음이 착잡하다. 같이 간 친구를 보니 허리춤에 양손을 올린 채로 한동안 아무런 말없이 초가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다. 친구의 속마음을 짐작할 수는 없지만 착잡한 심경이야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좁은 마당에 들어서니 시종 한 명이 허리를 약간 숙인 채로 방 쪽을 향해 읍하고 서있고, 무엇이 그리 서러운지 시녀 하나가 방 앞에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다. 또 한 명의 시녀는 두 손을 공손히 잡은 채로 서서 깊은 상념에 잠겨 있다. 물론 모두가 조형물이다. 

집 뒤로 돌아가니 위로 여는 작은 쪽문이 열려 있어 안을 들여다보니 아래 위 흰옷차림에 검은 수염의 사내가 개다리소반에 올려져있는 밥공기와 국그릇 하나, 간장종지 하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차마 저것을 어찌 먹을 수 있으랴하며 수저와 젓가락을 들 생각조차 없는 모양새다. 구중궁궐에서 매끼를 기름진 산해진미로 먹다가 개밥만도 못한 거친 상차림을 보고 기가 찼을 것 이다. 가슴 속에서는 회한과 울분이 치솟고, 마음속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화가 치밀지 않았을까? 

실제로 이렇게 유배됐던 연산군은 2개월여 만에 병들어 죽었다고 한다. 가시울타리 둘러쳐진 속 좁은 방안에 갇혀 있자니 화병이 났을 것이고, 먹는 것이 부실한 것도 한 원인일 것이다. 아니 자책을 하며 스스로 몸을 해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바싹 마른 체격에 모든 걸 체념한 듯 앉아 있는 연산군(모형)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온갖 호사를 누리던 폭군의 말로가 참 험했구나하는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연민의 정이 솟기도 한다. 인생의 말로가 너무 비참해 보였기 때문이다. 

연산군이 누구인가. 사약 받고 죽은 어머니의 원한을 풀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죽이며 피비린내를 풍기지 않았는가. 직언하는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으려고 신언패를 걸게 하지 않았는가. 바른 말을 하면 죽이겠다고 엄포하지 않았는가. 끊임없는 폭정으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지 않았는가. 그의 비참한 말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고 당연한 인과응보일 것이다.  

다시 앞 쪽으로 나와 타워크레인이 서있는 공사장 건너로 북쪽하늘을 보니 지척인 황해도의 산들 위로 흰 뭉게구름이 한가롭다. 하지만 저 땅에는 연산군 사후 500여 년이 지났는데도 그 같은 독재자가 동족을 괴롭히며 군림하고 있으니 통탄스럽지 않을 수 없다.

유배지를 한 번 더 휘둘러보고 내려오는데, 인권과 자유를 억압하고 법치를 무시하는 위정자가 이 땅에는 나타나지 않아야한다는 생각이 자꾸 머릿속에 맴돈다. 연산군의 사례에서 보듯 무한한 권력과 독재자는 존재할 수 없으니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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