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력 부재가 아니라 정치적 무능 탓’

충청권 시도지사. 왼쪽부터 이춘희 세종시장, 허태정 대전시장, 양승조 충남지사. 자료사진.
충청권 시도지사. 왼쪽부터 이춘희 세종시장, 허태정 대전시장, 양승조 충남지사. 자료사진.

여의도에서 말발 좀 있다는 정치평론가들은 ‘이준석 현상’의 원인에 대해 “20∼30세대가 지난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에서 ‘정치적 효능감’을 맛봤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투표를 했더니 원하는 후보가 당선되더라, 이번에는 우리가 원하는 당 대표를 뽑아보자’ 젊은 층에게 이런 인식의 흐름이 생겼다는 뜻이다.

누가 어떤 이유로 과거부터 통용돼 왔던 ‘정치적 성취감’이란 표현이 아니라 ‘효능감’이란 말을 사용했는지 알 수 없지만, 최근 정치권에서 ‘효능감’이란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성취감으로 대체할 수 있기에 사실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586들이 느꼈던 성취감이 대표적 사례다. 20∼30세대였던 그들이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 낸 성취감 하나로 정치무대의 전면에 선 지 벌써 20년을 훌쩍 넘겼다. 사실 2002년 노무현 당선, 2017년 박근혜 탄핵 등 중요한 정치적 변곡점의 중심에 586이 존재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어쩌면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정치적 효능(성취)감’을 가장 많이 맛 본 세대가 이들 586일지 모른다.

이 같은 정치적 성취감은 특정 세대끼리만 공유되는 개념은 아니다. 지역적 공유도 중요하게 작용해 왔다. 아마도 정권창출의 경험이 있는 영·호남이 가장 큰 효능감을 가진 지역일 것이다. 물론 영·호남의 정치 효능감이 항상 순기능으로만 작용해 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영·호남의 정권창출 효능감은 그들에게는 성취의 역사일지 모르지만, 우리 정치사에서 승자독식과 지역주의 폐단을 낳은 원인으로 작용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세대로 보나, 지역적으로 보나 정치 효능감은 반드시 필요한 경험이기도 하다. 정치 효능감을 맛보지 못한 세대와 지역은 ‘정치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 민주시민의 권리의식, 투표를 해야 하는 이유 등은 정치적 자존감에서 비롯되는데, 정치 효능감이 없다면 자존감마저 상실될 수 있는 까닭이다.

때문에 충청 정치의 연이은 실패는 주민들의 ‘정치적 효능감’을 높이기는커녕 반감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크다. 우선, 집권여당 대선후보 경쟁에 뛰어들었던 양승조 충남지사는 1차 관문에서 컷오프 수모를 당했다. 정치인 양승조의 도전이 실패했다는 것은 전혀 문제될 것 없지만, 그에게 기대를 걸었던 지지자와 도민들에게 정치적 패배감을 안겼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안희정’이라는 걸출한 스타를 보유하고 있었던 충청 정치권은 잠시 효능감을 맛 볼 기회가 있었지만, 그의 일탈과 낙마로 뚜렷한 대안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대전도 마찬가지다. 허태정 대전시장과 지역 정치권이 ‘올인’했던 ‘K-바이오 랩허브’ 유치전에서 대전은 인천에 밀려 고배를 마셨다. 대전시민들은 시장과 구청장, 국회의원 등 선출직 거의 전부를 집권여당에 몰아줬지만 ‘중기부 세종 이전’이나 ‘K-바이오 랩허브 유치실패’ 등 시련만 겪고 있다.

최근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복심으로 통하는 김경수 경남지사가 대전에 있는 LH연구원을 경남으로 이전시켜야 한다는 주장까지 펴면서 민주당 정부에 대한 반감이 더욱 커지고 있다. ‘선출직 전부를 몰아줬는데도 정치적 효능감을 얻기는커녕, 과거보다 더한 수모만 겪고 있다’는 것이 최근 대전시민들의 솔직한 마음일 것이다.

‘민주당이 깃발만 꽂으면 당선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세종시 역시 상황이 만만치 않다. 국회 세종의사당 건립비를 예산에 반영하고서도 정치권이 국회법 개정에 지지부진하면서, 시민들의 반감이 커지고 있다.

물론 여당은 야당이 법안처리를 가로막고 있다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지만, 민심이 야당만 탓하고 있지는 않다. 정부·여당이 세종시 부동산 가격을 잡는다며 제시하고 있는 시장 조치와 특별공급제도 손질에 대한 불만이 큰 까닭이다.

이 모든 충청권의 실패에 대해 ‘정치력 부재’를 탓하는 목소리가 많다. ‘정치력 부재’란 힘이 없어서 실익을 얻지 못한다는 뜻이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시민 입장에서는 답답할 노릇이다.

대전의 사례처럼, 집권여당에 선출직 거의 전부를 몰아줬는데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어떤 정치적 선택을 해야 ‘정치적 효능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시민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정치인들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정치력 부재가 아니라 정치인의 무능이 원인이란 뜻이다. 유권자들에게 효능감을 주지 못하는 정치, 충청의 정치인들이 시급하게 자각해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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