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장군 영정 모신 사당…푸른 숲 우거진 조경 ‘일품’

현충사 사당과, 입구인 충의문 전경.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정신을 선양하기 위한 곳으로,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현충사 사당과, 입구인 충의문 전경.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정신을 선양하기 위한 곳으로,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초록이 우거지는 6월. 때 이른 더위에 가족단위 나들이 장소를 찾는다면, 코로나19를 고려한 비대면 관광지이자 호국보훈의 달까지 기념할 수 있는 명소를 추천한다. 충남 아산시에 있는 현충사다.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방화산 기슭에 위치한 현충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정신과 위업을 선양하기 위한 곳으로,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아산시는 이순신 장군이 유년시절을 보낸 외갓집이 있고, 결혼 후 무과 급제 전까지 거주한 제2의 고향이다. 

때문에 장군 사후인 1706년(숙종 32년) 충청도 유생들은 이곳에 사당건립을 상소해 다음해 숙종은 현충사(顯忠祠)란 액자를 하사한다. 그러나 장군의 일생처럼 현충사도 파란만장한 운명을 맞는다.

1863년 흥선대원군은 서원을 국가제정의 낭비와 당쟁의 근원이라 여겨 서원철폐령을 강행하고, 충무공의 사당은 통영의 충렬사만 남고 모두 철폐된다. 이후 1906년 을사늑약에 분노한 유림들이 현충사 유허비를 건립한다. 하지만 이번엔 장군의 묘소 등 위토가 일제의 손에 넘어갈 지경에 처한다. 

현충사 내부를 거닐면 다양한 나무들이 신록의 풍경을 선사한다. 
현충사 내부를 거닐면 다양한 나무들이 신록의 풍경을 선사한다. 

사정은 이렇다. 독립운동 자금책으로 활동하던 이순신 장군의 후손들이, 일본은행에 위토를 저당 잡혀 대출금으로 자금을 마련하다 경매로 넘어가게 된 것. 이런 사정이 동아일보에 기사로 나가자 민족지사들은 ‘이충무공유적보존회’를 조직하고 국민들은 자발적 모금에 나선다. 

기생과 학생들까지 참여한 모금 결과 필요한 2600원의 8배 규모인 1만 6021원 30전이 모인다. 보존회는 1932년 빚을 청산하고 남은 돈으로 사당을 중건한다. 이후 1966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며 옛 사당 위편에 현재의 현충사가 건립됐다. 

현충사는 이 충무공의 구국정신이 깃든 곳이자, 국민들이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 일제의 손에서 되찾은 곳이다. 그래서인지 우거진 녹색 나무들이 선사하는 고요한 풍경에는 경건함이 묻어난다. 

충무공이순신기념관 내부 모습. 현재는 코로나19로 1일 500명으로 입장을 제한하고 있다.
충무공이순신기념관 내부 모습. 현재는 코로나19로 1일 500명으로 입장을 제한하고 있다.

2011년에는 전시관과 교육관을 갖춘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이 건립됐다. 전시관에는 장군과 임진왜란에 관한 각종 유물이 전시돼있고, 교육관에는 각종 강의와 세미나가 열린다. 4D영상도 관람할 수 있지만 최근에는 코로나19로 15명까지 인원을 제한한다. 기념관 관람도 1일 500명만 입장이 가능하다. 

전시관을 지나 충의문까지 이어지는 곧은길은, 장군의 충의를 보여주는 듯하다. 사당을 등지고 바라보면 저 멀리 배방의 설화산까지 이어지는 도시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오늘날 하루를 무사히 마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장군의 호국정신의 무게감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는 순간이다.

사당을 나와 동쪽으로 이동하면, 장군이 거주하던 고택이 나온다. 장군이 결혼한 뒤 들어와 살던 집으로 무과에 급제하기 전까지 거주했다. 당시 남귀여가혼(어느 정도 처가에 거주한 뒤 남편 집에 돌아가는 풍습)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이순신 장군이 무과 급제 때까지 거주했던 고택. 이곳에서는 지금도 장군의 제사가 모셔지고 있다.
이순신 장군이 무과 급제 때까지 거주했던 고택. 이곳에서는 지금도 장군의 제사가 모셔지고 있다.

인근에는 장군이 말을 달리고 무예를 연마한 산과 들판이 펼쳐져 있다. 활터도 있다. 그 앞에는 이를 지켜봤던 수령이 500년을 넘은 은행나무 한 쌍이 세월의 무게를 견디고 있다. 그 넘어 장군의 셋째 아들 이면의 무덤이 보인다. 

임진왜란 때 전장에 나가있던 장군이 어느 날 말에서 떨어지다 이면의 도움을 받는 꿈을 꾸는데, 그날 저녁  서신을 받는다. 모친을 모시고 고향집에 있던 이면이 분탕질을 하는 왜적과 싸우다 목숨을 잃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의 나이 21세였다.

이 소식을 듣고 장군은 목 놓아 통곡했다고 전해진다. 이면은 장군과 가장 닮은 아들이었다고 한다.

충의문 옆 바위. 한반도와 일본의 지도 모습이 새겨져 있어 일부러 옮겨 놓은 것으로 전해진다. 
충의문 옆 바위. 한반도와 일본의 지도 모습이 새겨져 있어 일부러 옮겨 놓은 것으로 전해진다. 

또 충의문 바로 앞, 한반도 모양의 무늬가 새겨진 바위도 눈에 띈다. 박 전 대통령이 온 나라에 장군의 가호가 긷들기를 기원하는 차원에서 일부러 옮겨 놓았다고 전해진다.

이외에도 현충사가 지어지기 전 마을에 내려졌던 정려(충신, 효자, 열녀를 본받도록 임금이 하사한 건물), 현충사를 중심으로 주변에 6개의 다양한 테마로 조성된 둘레길, 옛 현충사 건물 등 곳곳에 숨겨진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2012년부터는 전면 무료로 개방 시민들의 쉼터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여느 수목원 못지않은 신록의 푸르름을 만끽할 수 있는 현충사. 기품이 느껴지는 나무들과 자연 속 산새소리, 그 안에 담겨진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이 기사는 아산시와 함께하는 '숨은 명소, 비대면 힐링 휴양지' 시리즈로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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