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미래다] 청보리 캘리그라피 작가
‘행정수도 세종’ 시민 결집 숨은 조력자

급변하는 시대 상황에 맞춰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분야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에 맞는 인물의 발굴과 육성이 요구되고 있지만 현실은 녹록지 못하다.

대전과 세종, 충남지역에서도 새시대를 이끌 새 인물에 대한 관심이 높은 가운데 창간 20주년을 맞은 <디트뉴스24>가 10년 후 지역사회 각 분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할 동량 찾기에 나선다./편집자 주

청보리 김순자 캘리그라피 작가가 지역 예술인들과 함께 작업한 캘리 퍼포먼스.

5월 15일은 스승의 날이다. 동시에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탄신일이기도 하다. 1963년 충남 지역 청소년적십자 단원들이 ‘은사의 날’을 정해 스승을 찾아뵙던 일이 시초가 돼 지정된 법정기념일. 세종대왕의 탄신일이 스승의 날이 된 건 1965년부터다.

세종특별자치시는 세종대왕의 이름을 딴 도시다. 세종의 인문정신과 백성을 위한 어진 선정(善政)의 마음을 계승한 새 도시. 이곳에서 한글로 세종대왕의 정신을 잇는 사람이 있다. 청보리 김순자(47) 캘리크라피 작가다.

세종시청과 공공기관 곳곳에 설치된 ‘행정수도 세종, 개헌으로 완성’ 현판의 글씨가 바로 그의 작품이다. 행정수도시민대책위원회가 국회 앞마당에서 행정수도 완성을 염원하며 펼친 퍼포먼스에서도 어김없이 그의 글씨가 사용됐다.

영원한 참스승, 세종대왕의 탄신일을 앞두고 세종대왕상이 있는 세종시청 4층에서 청보리 작가를 만나 이야기 나눠봤다. 

시민 염원 담은 글씨

청보리 김순자 캘리그라피 작가가 세종시청 4층에 위치한 세종대왕 동상 앞에 서있다.
청보리 김순자 캘리그라피 작가가 세종시청 4층에 위치한 세종대왕 동상 앞에 서있다.

충남 금산에서 태어난 7남매 중 여섯 째. 서예를 시작해 디자인을 전공하고, 캘리그라피 작가로 활동하기까지 그는 스승과 어머니의 지지를 동시에 받았다. 화선지가 귀하던 시절, 엄마는 장날이면 대전 시장에 나가 먹과 종이를 사다주시곤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선생님께서 서예를 권유하셔서 글씨를 시작했어요. 중학교 때까지 서예를 했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미대 진학을 꿈꿨죠. 시각디자인을 전공했지만 글씨가 필요할 땐 직접 쓰기도 했고요.

땀이 뻘뻘 나는 여름날, 마루에 나와 글씨를 쓰고 있으면 엄마는 곁에서 시조를 읊어주셨죠. 화선지가 귀할 때였는데, 대전 큰 시장에 나갈 때면 엄마가 먹과 화선지를 사다주시곤 했어요.”

작가는 졸업 후 8년 간 직장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다 셋째를 낳고 프리랜서로 전향했다. 10여 년 간 미술학원 교습소를 운영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는 캘리와 디자인을 접목한 세계로 빠져들었다. 세종에 정착한 시기는 2015년. 한글도시 세종으로의 이주는 글씨로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자는 마음으로 청보리캘리그라피연구소를 내는 데 기폭제 역할을 했다.

“아마 제 생애 ‘행정수도 세종, 개헌으로 완성’이라는 글자를 가장 많이 쓴 것 같네요. 세종시청과 주민센터, 시의회에 걸려있는 글귀인데, 도시 건설의 취지와 시민들의 염원이 함께 담겨있는 문구예요. 시민대책위원회에 참여해 재능기부로 쓴 글씨인데, 국회의사당 퍼포먼스에 쓰일 때에는 보람이 컸죠.

지역화폐 ‘여민전’ 카드 디자인에 사용된 글씨도 마찬가지예요. 지역 상점에서 시민들이 이 카드를 내미는 걸 볼 때,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올해 3월에는 현직 대통령 임기 중 최초로 문재인 대통령이 국군간호사관학교 임관식에 참석하신 일이 있었어요. 우연히 그 행사에 사용된 마스크 제작 과정에 ‘대한민국을 지키는 아름다운 손길’이라는 글씨를 썼는데, 영광스러운 일이었죠. 천주교 신자로서 천주교 대전교구 세종 신청사 상량문을 쓴 것도 기억에 남고요.”

글씨는 나의 힘

'행정수도 세종, 개헌으로 완성' 자신이 쓴 글씨 작품 앞에 서 있는 청보리 작가.
'행정수도 세종, 개헌으로 완성' 자신이 쓴 글씨 작품 앞에 서 있는 청보리 작가.

그의 글씨는 다른 장르의 예술과 융합돼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완성된 작품이 아닌 글씨를 쓰는 과정 자체가 또다른 종합예술이 되기 때문. 첫 붓 획을 내려 점을 찍는 순간부터 낙관을 완성하기까지, 사람들의 시선은 붓길을 쫓는다.

지난해 말 코로나19 극복 희망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지역예술인과 함께한 세종시문화재단 공모사업, 김덕수 명인, 안숙선 명창과 함께한 선재문화제 퍼포먼스 경험은 작품세계를 넓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영평사와 국립세종수목원을 무대로 지역예술인들과 함께 협업한 일이 기억에 남아요. 캘리그라피 퍼포먼스와 우리춤, 우리음악으로 한국의 아름다움과 한글을 알리고, 희망의 메시지를 담았습니다. 매년 훌륭한 예술인분들이 모여 열고 있는 선재문화제에서도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했고요."

소통은 작가의 일상이다. 세종에 잠시 머물게 된 동티모르 유학생들과 외국에서 살다온 귀국학생들, 늦깎이 나이에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어르신들까지. 한글은 국적과 나이를 뛰어넘는 소통의 매개체가 된다.

“동티모르 국립대학 한국학센터에서 공부하는 친구들이 세종에 왔을 때, 한국 대학생들과 함께 캘리그라피로 한글을 알려주는 시간을 가졌어요. 서로 다른 문화를 연결하는 것이 바로 언어이고 예술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한 초등학교에서 귀국학생, 다문화 학생을 대상으로 캘리 수업을 했는데, 듣기도, 말하기도 서툰 학생들이 캘리그라피로 한글을 재밌게 익히더라고요.

한글문해수업을 하며 만난 80대 어르신들을 생각하면 늘 마음이 찡해요. 돌아가신 부모님, 자식 이름을 쓰며 울먹이시는 모습을 볼 때, 글씨에는 미안함, 기쁨, 그리움이 모두 담길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언젠가 그 어르신들이 자신의 작품으로 전시회도 열고, 책도 낼 수 있는 날을 기대하고 있어요.”

언어 소멸의 시대 ‘경종’

대한민국 100대 명산 캘리 기행을 통해 소통하고 있는 청보리 작가.
대한민국 100대 명산 캘리 기행을 통해 소통하고 있는 청보리 작가.

최근 작가는 대한민국 100대 명산 종주를 목표로 산 정상에서 글씨를 쓰고 있다. 체력 단련을 위해 남편을 따라 시작한 등산이 작품 활동의 연장선이 된 것. 자연에서 얻은 힘은 다시 일상에서 작품 활동의 지평을 넓혀가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산마다 빛깔이 다르고, 또 정상에서 글씨를 쓰다보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요. 산처럼 바른 생각, 바른 글씨, 바른 소통을 해야겠다는 다짐도 합니다.

이맘때쯤이면 넘실대는 청보리밭 풍경이 참 아름답잖아요. 그래서 더 감사한 마음으로 글씨를 쓰게 되는 것 같아요. 영글어가는 청보리를 보면 내 마음도 겸손해지고, 알알이 잘 익어가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세종대왕의 정신을 계승한 이 도시에서 선한 일들을 해보고 싶은 계획도 있다. 순우리말로 지어진 세종시의 동 이름과 마을 이름에 각각의 고유한 특성을 담아 작품으로 재탄생시키는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올해 3월 국군간호사관학교 임관식에 참여한 모습. 청보리 작가가 쓴 글씨가 마스크에 인쇄돼있다. (사진=청와대)
문재인 대통령이 올해 3월 국군간호사관학교 임관식에 참여한 모습. 청보리 작가가 쓴 글씨가 마스크에 인쇄돼있다. (사진=청와대)

“우리말로 만들어진 도시의 이름을 소재로 하나씩 작품을 정리하고 있어요. 내가 얼마나 예쁜 이름을 가진 마을에 살고 있는지, 한글도시 세종이라는 도시 정체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길 바랍니다.

취미로 시작한 일이 직업이 될 수 있어요. 경력단절여성을 대상으로 한 자격증 수업을 계속 열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 가지 분야를 깊이 있게 하다보면 새로운 꿈이 생기기도 하고, 전문성도 갖게 돼요. 제가 해냈듯이, 아이를 키우면서도 늘 무엇인가를 준비하고, 꿈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싶어요.”

끝으로 작가는 언어의 생명력을 이야기했다. 한글이 낯설어지는 일은 곧 소통의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글이 점점 잊혀지고, 왜곡되는 시대에 살고 있어요. 줄여 쓰거나 초성만 쓰거나 외래어와 혼합해 쓰거나, 어떤 문장들은 쓰는 사람의 마음과 달리 읽혀지기도 하죠. 아이들의 알림장은 이제 스마트폰 앱(APP)으로 오고, 사람들은 카톡 메신저로 대부분의 대화를 나누고요.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캘리그라피가, 글씨를 쓰는 일이 사회에 작은 경종을 울리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먼 미래에는 보존해야 하는 예술 분야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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