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문위원 칼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 수상 후 소감을 밝히고 있는 배우 윤여정씨. 오스카 홈페이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 수상 후 소감을 밝히고 있는 배우 윤여정씨. 오스카 홈페이지. 

미국 LA에서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윤여정씨가 한국배우 최초로 영화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작년에 최초의 아카데미 4관왕을 차지한 지 1년 만에 이룬 또 한 번의 쾌거가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의 문화적 위상을 드높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영화 100년사에 길이 남을 신화를 창조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놀라운 일은 그의 수상소감과 언론과의 대담에서 드러난 그의 말이 불러일으킨 국내·외적 신드롬 현상이다. 그의 말은 어렵고 힘든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과 감동, 그리고 교훈과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특히, 한국인의 인품과 의사소통(communication) 능력을 세계만방에 유감없이 보여준 것 같아서 오랜만에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

그동안 우리는 많은 정치인들의 저질적인 막말과 상호 적대적 언사에만 지겹게 익숙해 왔던 터라 윤 씨의 말을 통해 한동안 잊고 살았던 사람에 대한 매력과 향기를 느꼈다. 다소 어색한 발음의 영어 한마디 한마디에 모든 세대, 남녀, 국적을 뛰어넘어 울고 웃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즉 그의 말 속에 울림을 주는 의사소통의 성공적 코드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말 잘하는 법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받질 못했다. 지금도 초등교육에서 대학교육에 이르기 까지 의사소통에 대한 교육은 별로 중요시하지 않는다. 그저, 말없이 정답만을 찾는 입시위주의 방식이 여전히 교육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말을 매끄럽게 많이 쏟아내면 말을 잘한다고 알고 있다. 게다가 웅변조의 거침없는 말로 잠시라도 호소력이 있다면 정치인이 되라고 권장하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정치는 우선 국민들의 말을 잘 듣고, 경쟁자들 간 말로 싸우고 타협하고 협상해서 합의를 이루는 과업이다. 따라서 정치인들은 어떤 말을 어떻게 해서 국민들의 공감을 얻느냐가 관건이고 경쟁력이다. 어느 분야에서든 말을 말답게 잘하기 위한 성공 코드는 네 가지다.

진정성과 자신감

말을 잘해서 마음으로 잘 들어주는 첫 번째 성공 코드는 진정성과 자신감이다. 윤여정은 스크린에 데뷔한지 50년이 되었지만, 그 긴 여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이혼으로 인한 편견과 생계의 어려움, 배우로서 장기간 경력단절, 쉰 목소리의 약점 등을 극복하며 조연과 단역을 마다않고 묵묵히 평생을 연기해 왔다.

수상소감에서 아카데미상은 엄마가 열심히 살아온 결과물이라고 자식들에게 자신 있게 하는 말 속에 위선과 거짓 없이 살아온 삶의 내공이 느껴진다. 미국에서 살며 배운 생활영어는 마치 아카데미 시상식과 세계 언론과의 인터뷰를 위해 미리 준비한 것 같이 딱 맞아 떨어졌다.

이런 말이 있다. 연설을 잘하려면 영어로 하고, 연인과 사랑을 속삭이려면 불어가 좋고, 신의 존재에 대해 격렬한 토론을 하려면 독일어를 사용하고, 아이를 엄하게 꾸짖으려면 러시아 말이 어울린다는 것이다. 윤여정은 적절한 단어를 선택해서 영어로 진솔하게 말했기 때문에 세계를 향한 그 파장이 대단한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 각 분야에서 세계 최고가 되려면 외국어를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한국 정치인들의 말은 대부분 수려하다. 하지만, 국민들이 그 말을 신뢰하지 않는 것은 말과 행동이 다르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이 진정성이 없다면 그 말은 진심일 수 없다. 자신감은 진정성에서 나온다.

겸손과 배려

말을 통해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겸손하게 남을 배려할 줄 아는 교양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인격(人格)이다. 윤씨는 수상소감에서 “나는 경쟁을 믿지 않는다. 내가 어찌 대 배우 ‘글랜 크로스’를 감히 이길 수 있겠는가. 내가 오늘밤 그저 운이 좀 좋았을 뿐이다. 아니면 미국인들이 한국 배우를 환대한 결과”라고 했다. 수상 경쟁자들에게 정중함을 보여준 동시에 미국에서 발생한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점잖게 돌려 말한 그의 인품이 빛을 발한 것이다.

MZ세대라는 2030들이 꼰대로 알고 있었던 7080세대 윤여정에 열광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실수나 실패를 직설적으로 드러내 공유하며 자랑이나 잘난 척 하지 않는 인간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저렇게 우아하게 늙고 싶다”고 젊은 세대에게 미래 모델이 된 윤씨의 말은 오늘날 우리사회가 겪고 있는 세대 간의 단절을 이어줄 수 있는 한줄기 빛이 되고 있다. 정치인들도 가르치려 들지 말고 편가르기식 말 대신 상호존중의 자세와 속 깊은 말로 따뜻하게 다가가야 2030의 호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TOP (Time, Occasion, Place)

좋은 말을 잘 하려면 시와 때 그리고 장소에 맞는 말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아무리 근사한 말도 이 세 가지 상황에 맞지 않으면 낭패를 본다. 예컨대, 윤여정의 전 남편인 가수 조영남씨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 그의 말은 나름 솔직하고 재미있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그는 윤씨의 수상에 대해 “바람피운 남자들에 대한 최고의 복수가 아니겠냐. 나는 앞으로 더 조심해야지, 다른 남자 안 사귄 것에 대해 한없이 고맙다”는 절대 하지 말아야 할 황당한 소감을 내놔서 엄청난 지탄을 받았다. 시와 때 그리고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막말이다. 말 속에 예의와 주책도 없다.

그런가 하면, 한 미국 방송 진행자는 윤씨에게 ‘브래드 피트’에게서 어떤 냄새(smell)가 났느냐는 무례한 질문을 던져 국제적 망신을 당했다. 사람의 향기는 만리(萬里)에 미친다는 ‘화향(化香)백리, 주향(酒香)천리, 인향(人香)만리’의 뜻을 그 기자는 알리가 없을 것이다. 그저 본능적으로 남자 체취를 묻는 저질의 말이다.

오히려 윤씨가 “나는 냄새 맡는 개가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꾸짖음으로 더 호평을 받았다. 그간 적지 않은 정치인들이 때와 장소에 맞지 않게 장애인이나 여성 그리고 사회적 약자들을 폄하하는 말을 서슴지 않거나, 저속한 용어를 써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TOP의 원칙을 학습하지 못한 결과다.

유머와 위트

말 잘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즐겁다. 윤여정씨는 그간 까칠한 배우로 정평이 나있었다. 그러나 그는 긴 세월 여러 풍파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자신을 내려놓고 여유와 관용을 내면화했다. 그런 그의 인생이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는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이번에 특히 고상한 체(snobbish)하는 것으로 알려진 영국인들이 인정했다는 점에서 영광”이라고 했다. 영국인의 허풍 속내를 위트로 끌어내 웃음을 선사한 말의 백미다. 반면, 한국의 정치는 너무 살벌하다. 대다수 국민들은 정치인들의 말과 표정이 권위주의적이고 무섭다고 한다. 정치를 냉소적으로 보고 정치인을 존중하지 않는 많은 국민들의 마음을 바꾸려면 여유 있는 유머와 마음을 여는 위트가 담긴 말이 필요하다. 물론, 남을 비하하고 폄훼해서 웃기는 말은 절대 금기다.

결론적으로, 젊은 할머니 윤여정씨의 말에 반해서 ‘윤며들다(윤여정에게 스며들다)’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하며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는 바로 말을 잘하는 네 가지 성공 코드가 정확히 작동했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인들도 모든 세대와 지역에서 공감을 얻고 박수 받는 진짜 말 잘하는 사람들로 거듭나길 기대한다. 한 배우의 좋은 말이 세계 최고의 배우를 만들었듯이 정치인의 좋은 말도 최선의 한국 정치를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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