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은 가득이심리상담센터 대표
박경은 가득이심리상담센터 대표

용서를 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 더 이상 괴롭지 않기 위함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잘못도 모르는 사람이 뉘우치기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미안함도, 죄송함도 모르면서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란 말이 몸에 베어버린 사람도 있다. 이것이 자기회피적인 삶의 태도에서 발생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잘못을 한 적도 없는 데, 아픈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아픈 사람의 문제인 것인가? 잘못 한 적이 없다고 믿는 사람의 문제인 것인가? 그런 상황에서 그 사람을 용서한 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사람에게 ‘용서’라는 단어가 먹히기라도 할까? 그렇다고 해서 다른 방향(보복이나 법적 소송)으로 잘못을 알게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뚜렷한 증거자료가 없이는 법적 소송도 너무나 길고 그 시간과 비용도 만만치 않다. 오히려 그 시간과 비용 때문에 더 분노를 자극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용서는 마음으로 ‘자신’이 하는 것이다. 결국 그 사람과 삶의 가치관뿐만 아니라 갖춰진 인성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르다’고 말 것인가? ‘다름’에서 오는 상처는 누구의 몫인가?
 
‘용서’란 단어가 참 낯설고 어색하고 어렵다. ‘용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용서를 하거나 용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쉽게 말하면, ‘자기수용’을 먼저 생득되어야 한다. ‘자기수용’은 곧 ‘용서’를 하기 위한 첫 단추라고 생각해도 된다. 즉 친구와 갈등이 속에서 토라지거나 인연을 끊어내기보다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라고 생각하다보면 자신의 행동이나 타인을 수용하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라는 분노의 감정이 앞서기 때문에 ‘자기수용’까지는 많은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애써서 수용하라’는 말은 아니다.

용서란 ‘자기수용’이 된 다음에야 ‘자기용서’가 가능해진다. 즉 타인에 대한 자신의 부정적 정서를 수용하면서 그런 정서를 갖게 된 자신을 받아들이게 된다. 지금부터 이렇게 훈련하라. 자신이 자신에게 말한다. ‘그래, 네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겠니? 그런 부정적인 정서를 가졌다고 해서 자책 하지 마. 그리고 비난할 수도 있어. 넌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어.’ 등 다양한 대화내용으로 자신을 수용하고 용서하는 연습이 우선적으로 되어야 한다. 이 말의 의미는 모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라는 말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살다보면 자신의 노력과 상관없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일어난다. 어쩌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은 이미 전조증상을 보였음에도 감지하지 못했던 습관적 무감각에서 놓쳐버린 현상일 수 있다. 

기억력은 일생 중요한 요소이지만, 집요한 기억 때문에 정상 생활이 불가능한 경우도 적지 않다. 뇌의 편도체가 기억하고, 행동하고, 명령한다. 그 기억들로 인하여 마음이 작동한다. 때로는 기억하고 싶지 않는 많은 것들, 그러한 기억들이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다. 그 중 하나가 ‘용서’다. 우리는 서로 다른 기억들 속에서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아야만 하는 것인가? 그런 과정에서 진정한 사과가 이루어진다면 정말 다행스런 일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또 다른 상처를 만들게 된다. 그것이 더 아프다. 우리는 똑같은 장면에서 서로 다른 기억임을 알면서도 버리고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싶다. 즉 같은 곳을 바라본다고 해서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같은 생각을 한다고 해서 그 생각의 근원지가 같지 않다. 그것은 각자가 살아온 삶의 양식과 패턴의 다름이다. 이것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자신과 타인을 아프게는 하지 말아야 한다. 버리고 싶은 기억들, 그러나 버려지지 않는 기억들로부터 이제는 ‘내’가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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