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창호의 허튼소리] 수필가, 전 충남도 부여부군수

나창호 수필가.
나창호 수필가.

필자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60년대 말∽70년대 초 만해도 우리나라는 전형적인 농경사회였다. 농촌은 지금과 달리 인구가 무척 많았다. 3대가 한 집에 사는 경우도 많았고, 드물게는 증조부나 증조모가 생존해 4대가 함께 살기도 했다.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노동력이 없는 노인들을 자식들이 봉양해야 했고, 핵가족이라는 개념조차 거의 없던 시대였다.

노인들은 마을의 어른으로서 존경을 받았다. 아이들이 어른을 만나면 “진지 잡수셨어요?”하고 깍듯이 인사해야 했다. 아이들끼리 싸움을 하다가도 어른들이 나무라면 그쳐야 했다. 호통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또 그때는 지금과 달리 외국인을 보기가 참 힘들었다. 필자는 그때 고향을 떠나 교육도시 공주(읍 단위 소도시지만 대학과 중·고교가 많아서 그렇게 불렸다)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며 하숙생활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 노랑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외국인을 본 날이면 밥상머리 화제가 되기도 했다. 

“돼지고기 계십니까?” 한 외국인이 정육점에서 한 말이랬다. 존댓말에 서툰 어느 외국인이 노인 어른께 심한 반말을 했다가 “예끼 놈!” 하는 호통과 함께 장죽의 대꼬바리로 세게 얻어맞았다고 한다. 그 외국인 얼마나 아팠으면 한국에서 존댓말 쓰지 않으면 큰일이라 생각해 그리 말했을까. 아마도 존댓말을 써야할 대상에 익숙하지 않은 탓도 컸을 것이다. 

하여간 옛날의 노인들은 집안에서나 지역사회에서나 어른으로서 대접을 받았다. 당시는 유교적 관념과 장유유서의 예의적 사고가 엄연히 존재하던 시대였고, 노인들도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경제발전으로 삶이 윤택해지고 핵가족화가 된 오늘날은 평균수명이 크게 늘어 노인층이 한껏 증가했는데도 노인들에 대한 존경심은 외려 사라지고, 노인 혐오감마저 있다니 서글픈 일이다. 젊은이들이 노인들을 틀딱이니 꼰대니 진상이니 하며 비하한다는 것이다. 일부 노인들의 고루한 사고와 고집불통도 한 원인이겠지만 그렇다고 노인 포비아 (젊은 층의 노인에 대한 왜곡된 시선과 심리상태로 인한 노인 공포증) 현상은 심하지 싶다. 

젊은이들에게 이러한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는 노인들의 세련된 매너와 절제된 언행이 필요하겠지만, 노인이라는 이유로 비하하고 푸대접하는 것은 그릇된 행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사회현상에는 기성세대가 부추긴 면도 없지 않을 터이다. 

예컨대 나이 60이 넘으면 뇌세포가 상한다느니, 60∽70대는 투표하지 않고 집에서 쉬셔도 된다느니 하며 그릇된 인식을 심어준 면이 없지 않다. 마치 노인들은 사회의 걸림돌이라도 되는 것처럼.
 
또 노년층 자치단체장들이 저지른 성범죄 사건이나, 정치권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성추행 사건 등도 언론에 크게 부각되면서 청소년들에게 혐오감을 주었을 것이다.

최근의 언론보도에 의하면 의정부 경전철 내에서 중학생 일행(3명)이 70대 여성노인에게 욕설을 하고 목을 조르며 바닥에 넘어뜨리는 폭행사건을 저질렀다고 한다. 이들 중 누군가가 폭행 장면을 촬영해 재미삼아 동영상을 유포했다니 참담하기까지 하다. 지하철1호선에서도 같은 또래의 중학생(2명)이 노약자석에 앉아 있는 것을 훈계하는 한 남성노인에게 “노인네” “술 먹었으면 집에 가서 처자라” 운운의 막말과 폭행을 했다고 한다. 겨우 13살짜리 어린 학생들이 무엇 때문에 이리 일그러진 행동을 했는지 모르겠다. 혹여나 노인경시의 사회풍조에 영향을 받은 건 아닌지 모르겠다.

설령 노인들의 행동이 굼뜨고, 사고가 경직됐다하더라도 혐오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노인들에게도 나라 발전에 공헌한 젊은 시절이 있었고, 살아오는 동안 갖은 시행착오와 실패를 거듭한 끝에 성공한 삶을 통해 수많은 경험과 지혜를 쌓아 왔다. 젊은이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을 노인들은 알 수 있고 할 수도 있다.

고려장을 당하러 지게에 얹혀 가는 노모는 돌아가는 아들이 길을 잃을까 두려워 부지런히 나뭇가지를 꺾었다. (풀을 태운)재로 새끼를 꼬아보라는 과제를 받은 벼슬아치 아들에게 노모가 해답을 주었다. 

“아들아, 짚으로 새끼를 꼬아 태우면 재로 꼰 새끼가 아니더냐?” 젊은이에게 패기가 있다면 노인에게는 지혜가 있다.  “노인의 지혜는 도서관의 책보다 많다” 한때 세계를 제패했던 영국의 속담이다.
 
인간 100세 시대니 120세 시대니 한다. 노인층은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다. 이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은 지금의 노인들보다 한층 더 오래 살 것이다. 하지만 노인경시 풍조가 미래세대에도 계속된다면 그 시대를 사는 노인들의 삶은 암담하기 이를 데 없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젊은이와 노인이 함께 공존하는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데 힘을 쏟을 일이다. 

어느덧 나이가 제법인 필자도 봄비 같은 겨울비가 내리는 오늘, 젊은이들에게  책잡힐 말투나 행동거지를 하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한편으로 외국인에게까지 호되게 야단치며 못된 말버릇을 고쳐줬던 옛 어른들의 당당하던 시절이 그립다. “돼지고기 계십니까?” 슬며시 웃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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