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원 칼럼]

칼럼니스트 한기원
칼럼니스트 한기원

나를, 적어도 민주주의에 있어 ‘시계 제로’였던 80년대로 데려다 놓아 본다.

암울한 시기 캠퍼스에선 삼삼오오 모여 과연 우리가 지식인인가 파시스트인가를 놓고 언쟁을 벌인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팍팍한 현실을 다른 방법으로 바라보는, 그래서 현실너머를 간절하게 갈구하던 우리는 당시 그 논쟁을 일종의 해방구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당시 나는 한 점잖은 학자를 알고 있었다. 미국 유학을 다녀왔고 시도 쓰는 분이었는데 그 분의 전두환 체제 옹호발언은 도를 넘어도 한참을 넘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언론도 마찬가지였던 시절이긴 하지만.

어떻게 저렇게 반민주적인 황폐한 발언을 낯색하나 변하지 않고 거듭하는 것인지 그의 지식에 강한 의문을 가져 본 적이 있었다. 그건 내 몫이 아니고 순전히 그의 몫이라고 규정지어 보면서.

올초 유력 중앙일간지들의 지면은 신축년 새해 특집으로 미국의 유명 학자나 기업가의 인터뷰, 기고문이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남북관계에 대해, 늘 그러하듯이 미국 노(老)정객이나 학자들의 생각을 크게 소개했지만 보수든 진보든 국내 인사의 생각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북한이 그동안 정치·군사적인 통미봉남(通美封南)을 했었다면 남북관계에 있어 우리 언론에게 통미봉남을 당하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해방 후 지금까지 우리는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미국에 대한 절대적 의존 속에서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적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대체로 정당화되기 일쑤였으며 이를 당연시하거나 되레 강화시키려는 분들이 사회 곳곳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지 않았던가.

수많은 인재들이 자신이 미국적이거나 미국과 가깝다는 점을 내세워 지위를 점하고 유지해 왔다. 그러니까 우리의 보수에게 세계질서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안타깝게도 어느새 우리의 입장이 되어 있었다. 우리에게도 이른바 '미국주의'가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던 셈이다.

얼마 전 트럼프 대통령을 추종하면서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자를 반대하는 워싱턴 시위에 태극기가 등장하는 것을 보고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럴까?

우리의 광화문집회에 성조기가 등장하는 웃지못할 상황을 목도했을 때의 데자뷰로 과연 우리 국민이든 미국 국민이든 그들은 어느 나라 국민인가 의아했었다.

이제 우리는 진보, 보수를 떠나 미국이 없으면 큰일 날 것처럼 떠들어 댈 일이 아니라 적어도 대북포용정책에 관해서는 우리가 미국을 설득해 나가는 절실한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 민족의 운명을 미국인의 생각을 통해 접근하는 시대는 이제 박물관에 가야 옳지 않겠는가. 이를 미국의 바이든 행정부도 받아 들여야 마땅하다. 우리도 이제 미국이 추진중인 국가미사일방어(NMD)체제에 대한 반대입장을 분명히 표명할 수 있다는 것을.

한반도에서 평화공존의 실마리를 찾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 어떻게 백해무익한 NMD를 찬성만 하고 있으란 말인가. 미국주의에 젖은 일부 언론과 오피니언리더들이 무엇보다 민족이익을 위해 신중히 처신해야 하는 이유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이번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에 언제나 그러했듯 누구 누구를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하고 왔다고 우쭐대는 촌극은 더 이상 국민에게 희망을 주기 어렵다.

사회적으로 압도적인 지위를 가진 인사들이 사회헌신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그의 자유지만 그것이 정신분열에 가깝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대다수 선량한 국민을 위해서 단호하게 배척해야 마땅하다.

지금도 촛불에 빗대 ‘불장난을 오래하면 불에 덴다’고 얘기하는 분이 있다면 나는 그가 누구든 파시스트가 아니기를 바란다.
그저 이 시대가 낳은 맹목적이며 기형적인 보수주의자로 청산대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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