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황진웅 농부

스크린 영화 속 초능력으로 세상을 구하는 슈퍼히어로(Superhero)가 있다면, 우리 주변에는 묵묵히 주어진 소명을 실천하며 일상을 지키는 작은 영웅들이 있다. 코로나 시대 국민의 내일을 지키고, 누구도 관심 갖지 않는 토종 씨앗과 지역 문화재를 보물처럼 여기며, 자신의 것을 나눠 이름 모를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사람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연말을 맞아 우리 동네 작은 영웅들의 이야기를 시리즈로 소개한다. <편집자 주>

① 코로나 파견 근무, 박 과장의 잊지 못할 하루

② ‘영겁의 유적’ 세종시 문화재 지키는 파수꾼

③ ‘작은 등불’ 이름 모를 생명을 살리는 법 

④ 씨앗 한 알의 나비효과, 공주의 여름지기

버들벼연구회장이자 공주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황진웅 농부.
버들벼연구회장이자 공주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황진웅 농부.

농부의 또다른 이름은 여름지기다. 열매(여름)를 맺게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여름지기는 먹어야만 하는 운명을 가진 모든 목숨을 위해 심고, 거두는 사람이다.

과거 농경사회에서 씨앗은 곧 생존과 직결됐다. 씨앗이 없으면 수확도 없고, 식량이 없으면 배를 곯아야 했다. 한 알의 씨앗은 목숨과도 같았다.

코로나19 시대 ‘식량’에 관한 문제의식이 커지고 있다. 다국적 종자회사가 생산량을 조절하거나, 수·출입에 문제가 생기거나, 기후나 환경 등이 변화하면, 언젠가 씨앗대란이 닥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충남 공주 농부 황진웅 씨는 토종 씨앗의 명맥을 잇고, 나아가 씨앗에 담긴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이 일은 씨앗이 곧 삶의 근본이라는 명제를 깨닫게 하고, 주체적인 농부의 삶이란 무엇인지 고민하게 한다.

씨앗 한 알이 곧 하나의 세계

공주 토종 품종인 버들벼는 지난 2019년 세계식문화유산 ‘맛의 방주’에 등재됐다.
공주 토종 품종인 버들벼는 지난 2019년 세계식문화유산 ‘맛의 방주’에 등재됐다.

황 농부는 공주 계룡면 봉명리에서 9년 째 농사를 짓고 있다. 작은 버들방앗간도 함께 운영 중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그가 어릴 적 충남 홍성에서 가장 큰 방앗간을 운영했다. 

“농부가 되기 전에는 기술적인 지식을 활용해 마케팅하는 일을 했어요. 하지만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누구나 농사의 본능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누구든지 농사로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죠.”

그는 버들벼 농사를 짓는다. 버들벼는 한반도에 잔존하는 토종벼 중 가장 오래된 품종이다. 신석기 무렵부터 공주와 당진, 옥천 등 충청도 일부 지역에서 재배돼왔다.

보급종 벼보다 낱알이 작고 둥근 것이 특징이다. 단단하고 찰기가 많아 밥을 지어 먹으면 달고 구수한 맛이 난다. 현재 공주 계룡면 일대에서 명맥이 이어지고 있고, 계룡면 유평리에는 버들미마을이 있다.

“버들벼는 2019년 세계식문화유산 ‘맛의 방주’에 등재되기도 했어요. 키가 큰 능수버들, 물가에 있는 나무를 닮았다 해서 버들벼라고 부릅니다. 공주에서는 매년 약 7~8개 농가에서 재배합니다.”

그는 토종 작물을 재배하는 일 외에도 토종 씨앗을 발굴·수집해 알리는 작업도 하고 있다. 토종씨앗과 관련된 전시를 기획하거나 집집마다 전해 내려오는 씨앗에 담긴 이야기를 채록하는 일이다. 

“올해 공주 지역에서 발굴한 토종씨앗은 총 51종입니다. 스토리 발굴 작업까지 마쳤어요. 씨앗은 이미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오랜 시간을 거치며 다양한 이야기를 갖게 됐고요. 그 이야기를 책과 영상으로 만들어 기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토종씨앗 농사는 전국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농부들이 농사 이외의 활동을 지속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죠. 이곳은 자본의 세계이고, 농부 역시 이 구조를 벗어나기 어려우니까요. 결국 행정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씨앗도 지적소유권이 있다고?

지난 11월 공주 제민천변 옛 수선집에서 열린 전시장 모습. 공주에서 발굴·수집한 토종씨앗들이 전시돼있다.
지난 11월 공주 제민천변 옛 수선집에서 열린 전시장 모습. 공주에서 발굴·수집한 토종씨앗들이 전시돼있다.

작물의 단점을 보완해 만든 개량종은 세계 식량 문제 해소에 크게 기여했다. 동시에 이 기간 거대 종자회사들은 씨앗을 통해 식량을 소유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씨앗에도 지적소유권이 있어요. 로열티가 있는 거죠. 하지만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온 씨앗은 유산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인류의 것’이라는 보편적 소유권을 인정해요. 국가의 농정 정책은 2017년 발효된 나고야 의정서에 담긴 정신을 육성하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세계 종자시장 규모는 2010년 307억 달러(약 33조 7700억 원)에서 2018년 417억 달러(약 45조 8700억 원)로 연평균 3.9%의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48조 원에 달하는 세계 종자시장에서 국내 종자 비중은 1.3%에 불과하다.

지난 10년간 정부가 해외 국가에 지급한 종자 로열티는 1357억 원이지만, 국내 품목이 해외에서 벌어들인 로열티는 같은 기간 25억 9300만 원으로 2% 수준에 불과했다. 2017년 8월 생물자원에 대한 권리인 ‘나고야의정서’가 발효됐지만, 생물주권을 지키는 일은 아직 갈 길이 멀다.

“농사는 투자한 금액만큼 수익이 난다는 보장이 없는 분야입니다. 더군다나 토종 작물은 판로의 문제가 있어서 수확과 재배 순환 구조를 만드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요. 보편적인 농사를 지으면서 수익을 내 삶을 영위하는 것도 치열한데, 토종 작물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죠. 

일부 농부들은 일종의 저항주의를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농부가 농사를 짓고 자신의 작물을 마케팅하고, 문화적으로 특성화시키는 일, 농사하는 사람이 자기의 농산물을 결정하고, 자기만의 브랜드를 갖고 자신의 인생을 사는, 그런 세상이 되길 바라는 겁니다. 그게 진정한 로컬리제이션(Localization)이라고 보는 거고요.”

인류 정체성의 뿌리 '농경문화'

화화(禾火)토기. 신석기 시대 농경 문화와 선사 토기문화를 연결 짓는 심경보 도예가의 작품.
신석기 시대 농경 문화와 토기문화를 연결 짓는 전시 작품. 

그는 지방자치제도에 뿌리를 둔 로컬푸드 개념이 확장성을 가져야 한다는 점도 지적했다. 소도시 농업이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한 차원에서다.

“지역 농산물이 지역에서 소비되는 순환구조를 갖추겠다는 것이 바로 로컬푸드 운동입니다. 국가가 장려한 이 정책의 첫 번째 문제는 소비와 생산이 늘 맞아떨어지진 않는다는 거죠. 인근 천안이나 세종 정도는 그럴 수 있지만, 공주 같은 소도시는 불가능합니다.

오늘날 농업은 국가 농정 시스템에 종속돼있어요. 수확물을 농협 경매시장에 내놓고, 팔리면 수익이 나는 구조입니다. 수익을 내기 위해서는 많은 자본을 투입해야 합니다. 농지를 넓히고, 비료나 기계도 늘려야 하죠. 중앙 물류 시스템이 유지되는 한 어느 도시든 도매상에서 떼 온 물건을 팔겁니다. 이 시스템 안에선 로컬리제이션도 사실은 설 수 있는 자리가 없는 거예요.”

최근 공주에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토종 곡물을 활용한 커피, 베이커리를 파는 카페가 문을 열고, 토종씨앗-농경문화를 잇는 전시, 토종 곡물 경험 워크숍 등이 진행되고 있다. 아주까리밤콩, 배추밤콩, 돌녹두. 이름마저 정다운 토종씨앗 한 알이 낸 파급효과다.

“농사를 짓고 수확을 했다면, 선조들은 당연히 수확물을 담을 용기를 만들었겠죠? 화화(禾火)토기, 벼 화자에 불 화자를 써서 제가 이름 붙였어요. 신석기 시대부터 재배된 버들벼와 선사 토기문화를 연결지은 한 도예가의 작품을 올해 전시에서 선보였습니다.

문화의 원류는 농경이에요. 공주라는 도시의 문화 정체성도 결국 농사에서 찾을 수 있고요. 곡물, 그중에서도 쌀은 우리의 주식입니다. 무엇을 먹느냐가 곧 문화이고 사고체계가 됩니다. 먹는 것이 곧 우리의 정체성인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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