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용 칼럼]

정부대전청사 앞에 걸려 있던 중소벤처기업부 이전 반대 현수막. 자료사진.
정부대전청사 앞에 걸려 있던 중소벤처기업부 이전 반대 현수막. 자료사진.

지난 일요일 대전방송(TJB)에서 이상한 토론회를 봤다. 중소벤처기업부(중기부)의 세종시 이전을 주제로 한 토론 프로였다. 여당 토론자는 없이 야당 쪽만 두 명이 나와 있는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중요한 지역 현안, 특히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내용이면 여야 패널이 함께 나오는 게 철칙이다. 사회자는 철칙을 지키지 못한 사정을 두 번이나 설명해주었다. 지역 여권의 목소리도 들어보려고 열심히 연락했으나 모두들 일정이 안 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고 했다.

대전시장과 국회의원 7명, 그 외 대전시와 더불어민주당 대전시당 간부 등을 포함하면 ‘입’이 열 개도 넘을 텐데 토론회에 나올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얘기다. 중기부의 탈(脫)대전 저지운동의 완패를 뜻한다. 야당 패널은 “민주당 일색의 지역정치가 대전시민들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하고 쥐구멍에 숨고 있다”고 했다. “대전에 국회의장 5선의원 3선의원 재선의원들도 있는데 이 분들 도대체 뭐하고 있느냐”고 비판했다. 시사 토론회가 아니라 지역여권 규탄프로처럼 되고 말았다.

쥐구멍 찾아야 하는 대전 지역 여당 정치인들

중기부 문제의 완패는 야당 국민의힘에겐 정치적 호재다. 대전시장과 5개구청장 국회의원 100%가 여당인 민주당인데 민주당 사람들이 토론회 대신 쥐구멍을 찾아야 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왜 안 그렇겠는가? 그러나 이번 중기부 건은 여야의 문제는 아니다. 여당과 정부가 야당 지역을 경시하는 문제가 아니다. 지역 정치인들이 전부 여당인 데도 오히려 정부에 홀대를 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지역의 빈약한 정치적 역량 문제로 볼 수 있다. 

이는 여야가 뒤바뀌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정권에서든 지역의 이해가 크게 걸린 문제에서 대전 충남은 스스로 이겨본 적이 없다. 중기부 이전이나 KTX 서대전역 문제처럼 지역의 이해가 걸린 문제에 관한 한, 대전에는 시장도 국회의원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래도 지금은 여당이 싹쓸이로 모든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인데 기관을 새로 유치하기는커녕 있던 기관조차 빼앗기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참패는 없었다. 

세종시에 정부 부처가 다 모여 있는 만큼 중기부가 옮겨가는 게 마땅하다는 의견도 없지는 않다. 정부 입장에선 그렇게 말할 수 있으나 반대 논리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대전과 세종이 천 리나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니고 지척의 거리이기 때문에 굳이 세종시로 옮겨가야 할 이유는 못된다. 정부가 추진하는 지역균형발전 정책은 수도권이 아닌 곳에 위치한 기관은 세종시로의 이전 대상에서 제외해놓고 있다. 중기부가 여기에 해당된다. 중기부 직원들이 집값이 뛰는 세종으로 가고 싶어하고 정부가 이를 받아들인 것일 뿐 불가피한 사유는 없다.

대통령은 작년 1월 대전에 와서 “우리가 가는 길은 4차산업혁명의 길이고 대전은 4차산업혁명의 선도 도시”라고 추켜세웠다. 말뿐이었다. 인공지능 분야 등 여기에 걸맞는 국가정책 사업들은 ‘보통도시’ 부산이나 광주 같은 곳에서 가져가고 정작 ‘4차산업특별도시’ 대전은 아직도 손가락만 빨고 있다. 지역 정치권의 무능이 가장 큰 원인이지만 정부 책임도 작지 않다. 정부는 힘있는 지역만 챙긴다. 역대 정부가 그런 편이었지만 현 정부는 특히 심하고 노골적이다. 제 밥그릇도 못 챙기는 대전 충남은 최대 피해자다. 

기상청 수용하면 ‘제2 제3 중기부 실패’ 지속될 것

정부는 중기부를 빼내가면서 기상청을 받으라고 제안하고 있다. 정세균 총리는 지난 22일 “중기부가 세종시로 이전하면 정부대전청사에 기상청 등 수도권의 청 단위 기관이 이전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바로 다음날 허태정 시장은 “정부가 부 단위의 기관은 세종에 두겠다는 기본 방침을 정한 것으로 보이는 만큼 대전에 최대한 이익이 올 수 있도록 남은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했다. 즉각적인 백기투항이다. 정부 제안도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다. 박영순 민주당대전시장위원장도 ‘충분한 보상과 플러스 알파’를 언급하며 수용 의사를 밝혔다. 

필자는 반대다. 기상청이 오면 411명의 본청 인력이 대전으로 내려오게 된다. 499명이 빠져 나가는 중기부보다 인원수가 적어서는 아니다. 중기부에 비하면 4차산업도시 대전에겐 여러모로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도 반대의 이유는 아니다. 이러한 굴욕적인 타협이 대전을 더 비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런 식의 대응이 이런 꼴을 당하는 ‘지금의 대전’을 만들었다고 본다. 기상청을 받아들이는 것은 대전이 앞으로도 ‘제2, 제3의 중기부 참패’를 예약해 놓는 것과 다름없다.

대전은 이런 일을 당할 때마다 목소리를 제대로 내본 적이 없다. 이번 중기부 문제도 실질적 결정권은 청와대에 있는데 여당 사람들은 엉뚱하게 행안부와 중기부 앞에 천막을 치고 농성 시늉만 했다. 청와대 앞엔 얼씬도 못했다. 지역 문제에 이런 식으로 대하는 사람들은 대전 정치인들밖에 없다. 대전도 ‘대처 방법’을 바꿔볼 때가 됐다. 설사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제대로 ‘끽소리’는 한번 내봤으면 한다. 대전시는 정부의 기상청 카드를 거부해야 한다. 

대전시장, 중기부 잃었어도 대전시민 자존심 지켜주길

기상청을 받아들이면 대전은 중기부와 함께 대전의 자존심까지 잃게 되고, 기상청을 거부하면 중기부는 잃지만 지역의 자존심은 지킬 수 있다. 대전시가 처음부터 중기부 이전에 동의하고 ‘거래’를 협의해왔다면 기상청을 받을 수도 있다. 그야말로 실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참패한 뒤에 받는 보상은 보상이 아니라 ‘굴욕의 유물’이 될 뿐이다. 대전이 아무리 힘이 없는 지역이기로소니 기상청 하나에 또한번 나가떨어지는 도시는 아니다. 배고픈 거지도 이런 식으로 얻어먹지는 않는다. 실리가 다 실리는 아니다.

대전시장은 중기부 문제에 무한책임을 느낀다고 했다. 행동이 따라야 한다. 기상청을 덥석 받는 것은 150만 대전시민 누구라도 할 수 있다. 용기도 노력도 별 필요가 없는 일이다. 무한책임과는 거리가 있다. 필자는 기상청보다는 대전시민들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시장을 원한다. 대전시가 계속되는, 습관처럼 돼버린 ‘실패의 사슬’을 끊으려면 시장부터 용기를 내야 한다.

저작권자 © 디트NEWS24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