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시 관광문화재과 김정기 학예연구사

스크린 영화 속 초능력으로 세상을 구하는 슈퍼히어로(Superhero)가 있다면, 우리 주변에는 묵묵히 주어진 소명을 실천하며 일상을 지키는 작은 영웅들이 있다. 코로나 시대 국민의 내일을 지키고, 누구도 관심 갖지 않는 토종 씨앗과 지역 문화재를 보물처럼 여기며, 자신의 것을 나눠 이름 모를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사람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연말을 맞아 우리 동네 작은 영웅들의 이야기를 시리즈로 소개한다. <편집자 주>

① 코로나 파견 근무, 박 과장의 잊지 못할 하루

② ‘영겁의 유적’ 세종시 문화재 지키는 파수꾼

김정기 세종시 관광문화재과 학예연구사.
김정기 세종시 관광문화재과 학예연구사.

1600여 년 전 멸망한 백제 터에 세워지는 새로운 도시, 세종. 이곳에서 누군가는 영겁으로 묻힐 뻔한 문화재를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하고 있다.

연말 세종시는 문화재 보존관리 유공 단체로 선정돼 문화재청 표창을 받았다. 지역문화재 활용 사업 평가(연기향교)에선 3년 연속 우수 사업에 선정되며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도 했다.

시 관광문화재과 이칠복 과장의 각별한 지원을 비롯해 출범 이후 9년째 문화재 지정 업무를 맡고 있는 김정기 학예연구사(43)의 노력이 뒷받침돼 이뤄낸 성과다. 김 학예사는 고고학 전공자로 시청 내 3명뿐인 학예연구사 중 한 명이다.

새롭게 발굴되는 유적을 보존하는 일부터 시 지정 문화재를 국가 문화재로 격상하는 일까지, 출범 9년차 신생도시의 문화재 업무는 멀고도 험하다. 문화재가 곧 도시의 역사, 도시의 정체성을 결정짓는다는 책임감으로 근무 중인 김 학예사를 통해 도시 역사를 되돌아봤다. 

한 뜻 모은 부강성당, ‘산성’의 가진 역사성

세종시 부강성당 본당 모습.
세종시 부강성당 본당 모습.

부강성당은 올해 6월 국가등록문화재 제784호로 지정됐다. 지난해 구 산일제사공장에 이어 2년 연속 국가등록문화재 지정 성과가 나왔다. 3년 간에 걸친 등록 작업이 마무리되면서 김 학예사는 천주교 청주교구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부강성당은 이길두 신부님, 신도들과 함께 노력한 결과여서 더 뜻깊습니다. 초반에는 주민들이 지역 개발이 안 된다는 우려에서 반대하기도 해 설득하는 과정이 있었어요. 부강성당은 인근 충북 오송성당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1934년 지어진 한옥성당 건물이 남아 있어 역사성과 그 가치가 더 큽니다. 건물 다락에서 나온 건물 도면과 당시 천주교 구휼활동을 보여주는 사진과 기록물 모두 큰 도움이 됐고요. 앞으로는 이 자료까지 등록문화재로 추진해보려 합니다.”

‘산성’은 세종시 역사·문화자원 중 가장 중요하게 꼽히는 유적이다. 삼국시대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치열하게 대립했던 곳임을 알려주는 증거이기 때문. 소정면 1개소, 전의면 4개소, 전동면 5개소, 연서면 2개소, 조치원읍 1개소, 연기면 3개소, 장군면 5개소, 나성동 1개소, 금남면 2개소, 부강면 10개소, 연동면 1개소 등 모두 34개소의 성곽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세종은 과거 삼국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곳입니다. 백제는 475년 수도를 웅진으로 천도했는데, 연기군 지역은 공주로 이어지는 주요 교통로에 위치해 그 중요성이 컸죠. 천안, 아산 방면에서 공주로 가는 길목에 고려산성, 증산성, 이성, 작성, 금이성으로 이어지는 산성이 열을 지어 배치돼있는 이유입니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공주로 향할 때 도움을 준 이도가 살던 곳이 바로 전의 이성입니다. 이성은 국내에서 백제의 석축산성이 확인된 최초의 사례예요. 올해 시굴조사 결과 성벽을 적어도 2차례 이상 고쳐 쌓은 것으로 확인됐고, 지형과 축조시기에 따라 사용된 성돌의 크기와 형태도 달리 나타났습니다.”

지난달 세종시 전의면 신방리 이성산성 시굴조사에서 발견된 성벽 흔적. 
지난달 세종시 전의면 신방리 이성산성 시굴조사에서 발견된 성벽 흔적. 

전의 이성은 현재 시 지정기념물 제4호로 등록돼있다. 조만간 세종시 최초 국가사적으로 지정될 가능성이 가장 큰 유적 중 하나다. 성벽 안쪽에서 다수의 백제토기와 기와편 등이 출토돼 성벽을 처음 축조한 국가는 사비 백제일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 정상부 일대에는 4단으로 이뤄진 다중 평탄지가 자리하고 있는데, 가장 높은 4단은 장대지, 3단은 지하 저수 또는 저장시설, 2단은 석축 건물지, 가장 낮은 1단에는 초석(다각형) 건물지를 배치해 중요도에 따른 공간 구분이 나타나는 게 특징입니다. 각 평탄지는 용도에 따라 공간의 구획, 면적이 다르게 조성돼있어요. 이 같은 다중 평탄지는 지금까지 국내에서 확인된 사례가 없었습니다.

내년 본예산에 발굴조사 사업비 5억 원이 확보됐는데, 갑자기 예산이 필요해 과장님이 직접 시의회를 찾아다니며 동분서주 하셨어요. 덕분에 내년에는 성벽과 내부시설의 양상, 운주산성과 금이성 등 주변 산성과의 비교 연구를 통해 삼국시대 산성의 특징과 역사성까지 밝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반복된다' 나성동 유적과 도시 정체성

김 학예연구사가 운주산성의 국가 지정 문화재 등록 필요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 학예사가 운주산성의 국가 지정 문화재 등록 필요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전의면 운주산성의 국가 지정 사적 승격은 관련 역사학계에서도 오랜 숙원으로 꼽힌다. 운주산성은 백제부흥운동의 마지막 근거지로 꼽히는 주류성(周留城)으로 주목받았다. 다만, 산성의 경우 국가 사적으로 지정하기 위한 과정 자체가 만만치 않다.

“해발 460m 운주산에 위치한 운주산성은 북동쪽으로 천안 성남면 일원, 남동쪽으로 청주시 오송읍까지 관찰되는 넓은 가시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벽을 보면, 삼국시대 전형적인 축조방법이 관찰되고요. 외성 둘레 3091m, 내성 577m에 이르는 세종에서 가장 큰 산성이기도 하고, 고대 산성중에서도 큰 규모에 속합니다. 백제산성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안타깝게도 3차례의 시·발굴조사에도 극히 일부분만 확인돼 아직 축조시기와 축조 목적을 실체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이에요.

국가지정 문화재로 지정되려면 산성의 축조시기와 축조세력 등 그 성격을 밝히는 일이 선행돼야 합니다. 종합정비기본계획 연구용역이 필요하고, 연차적 발굴조사가 이뤄져야겠죠. 최근 사적으로 지정된 인천 계양산성만 해도 1997년부터 총 10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뤄진 다음에야 지정을 받을 수 있었어요. 정말 장기적인 관심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역사적으로 재조명받아야 할 산성을 꼽는다면, 단연 나성동토성이다. 이 토성은 현재 나성동 독락정 역사공원 내에 위치해있으나 동벽과 북벽 330m 정도만 남아 있다. 나성리유적과 같은 시기의 유물이 출토돼 그 시기를 짐작케 한다. 

“나성동토성은 공주 공산성으로 향하는 하천 교통로인 금강의 북안에 있고, 금강유역을 따라 평야가 발달한 지역에 위치한 유일한 평지성입니다. 세종시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이라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해요.

계획도시로 개발되고 있는 지금의 세종시도 운명적으로 나성동을 중심상업지구로 두고 있습니다. 나성리유적이 4세기 중·후반에서 5세기 말인 백제 한성기에 형성된 대규모 지방 취락 유적임을 고려하면, 지금의 세종시라는 도시는 사실 백제시대부터 이어져 온 셈이죠.”

나성동토성 위성사진. 금강 유역에 위치한 세종시 유일 평지성으로 꼽힌다. 인근 나성동유적과 같이 백제시대의 유물이 다량 출토됐다.
나성동토성 위성사진. 금강 유역에 위치한 세종시 유일 평지성으로 꼽힌다. 인근 나성동유적과 같이 백제시대의 유물이 다량 출토됐다.

안타까운 점은 도시 개발로 인해 아파트와 상업시설이 들어서면서 나성동유적의 많은 부분이 발굴되지 못한 채 묻혔다는 사실이다. 유적 발굴 시 역사공원으로 조성하는 정책이 시행되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문화재가 찬밥 신세가 되는 경우도 다반사다.

“행복도시 조성 과정에서 청동기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유적이 확인됐습니다. 그중 나성동유적이 사라진 점이 가장 아쉬운 부분이에요. 세종시특별법에 따르면, 개발 도중 문화재가 발굴될 시 이를 이전하지 않고 역사공원을 만들어 보존하도록 돼있습니다.

하지만 LH 측에서는 보존 관리 비용 부담과 개발 사업 장기화 등의 요인으로 원지형 보존에 그치고 있는 게 현실이죠. 매번 이를 촉구하는 공문을 보내는 게 제 일이고요. 역사공원 조성도 보존·관리에 비중을 두기 보단 인근 공원 부지 개발에만 치중되고 있는데, 시민들과 공존하는 문화재 시설이 되기 위해서는 이를 보완할 필요가 있습니다.”

개발 논리가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하는 신도시에서 문화재 보존·발굴·정비 측면은 소홀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상존한다. 부서 차원에서 문화재 지정·등록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올해는 전의 비암사 극락보전 국가지정문화재(보물) 지정을 위한 절차가 진행되고 있고, 내년에는 임난수 장군이 심었다는 세종리 은행나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기 위한 연구 용역이 발주된다. 최근에는 전의초 앞 전의현 관아로 추정되는 유적이 발굴됐다. 

“문화재는 한번 훼손되면 회복이 불가능해요.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에 대한 원형 보존·관리는 미래 세대를 위해서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과거에는 문화재 지정과 개발 논리가 상충됐다면, 이제는 달라졌어요. 부강성당은 한옥건물을 활용한 성당스테이가, 홍판서댁은 내년 야간 조명이 설치됩니다. 인근 김재식 가옥도 등록문화재 신청 절차를 진행 중이어서 향후 관광코스화도 기대할 수 있어요.

경주나 부여 사례를 보면 이제 도시의 문화재는 보존과 더불어 이를 어떻게 관광자원화 하는지 와도 연결됩니다. 올해 세종시 인문, 지리, 역사 등 전 분야를 집대성한 ‘디지털세종문화대전’이 편찬됐어요. 이제 시민들은 온라인으로 누구나 쉽게 시 문화유산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 문화재를 많이 보고, 느끼고, 찾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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