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은의 힐링에세이
‘제가 자주 욱해요.’, ‘남편이 감정이 욱해요.’, ‘부모님이 감정이 기복이 심해요.’ 등 주변에서 감정조절이 되지 않는다고 흔히들 그렇게들 말을 한다. 인간을 ‘감정의 동물’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다양한 감정을 지니고 있는 유일한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감정 속에는 ‘욱’하는 성질도 포함되어 있다. 반대로 감사함이 충만한 사람은 ‘부모님은 늘 자상하시고 온화하신 분이었어요.’, ‘저는 매사에 감사해요.’, ‘저희 부부는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감사하게 받아드려요.’ 이렇게 표현한다. 그러나 흔치 않다. ‘흔치 않다’라는 것은 그런 사람이 소수이기 보다는 왠지 자랑하는 것 같고 쑥스럽기도 하고 상대방은 힘들다고 말하는데 거기에 대놓고 휘발유를 뿌릴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그 사람의 인품 속에 있는 겸손이고 절제다.
그렇다면 ‘욱’하는 것이 나쁜 것일까? 아니다. 불편함이다. ‘자다가 웬 날벼락’처럼 평온한 상태에서 갑자기 ‘욱’을 받게 되는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동안 쌓여졌던 것들이 다른 사람과 감정이 부정적이고 억울하고 분노할 때 당사자에게는 화를 못 내고 가장 만만한 대상에게 버럭 화를 내는 것이다. 만만한 대상은 가족(부모, 자녀)이 될 확률이 많다. 만만하기 보다는 자신의 약점을 다 들어내도 가장 안전한 집단을 의미한다.
버럭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을 때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쏟아내는 경우가 많다. ‘내가 빨리 죽어야지 이런 꼴을 안 당하지.’, ‘살아서 뭐 하냐, 미래가 깜깜한데.’, ‘부모 없는 자식처럼 버릇없니 컸나.’, ‘너희 꼴 안 보려면 내가 먼저 죽어야지.’, ‘죽고 없어진 다음에야 후회하지 마라.’ 등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실존이다. 또한 이러한 말들은 아무리 화도 나더라도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이다. 그 이유는 자신의 대한 한탄의 소리가 마치 타인으로 인한 남의 탓으로 돌리면서 죄책감을 심어주는 말들이기 때문이다. 감정에 욱했을 때는 삶과 죽음의 문제가 부딪히게 된다. 살아가자니 경제가 어렵고, 죽자니 쉬운 일은 아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가운데 어느 누군가 감정을 조금이라도 건들어지면 펑하고 터지고 만다. 즉, 가득하게 불어놓은 풍선에 바늘을 살짝 갖다 대는 격이다. 이것이 자신의 감정을 잘 살펴야 하는 이유다.
'하지 말아야 할 말'도 있지만 굳이 '하지 말아야 할 말'도 없다.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우선적인 문제도 있지만 충분히 상황과 개인의 성향에 따라서는 충격과 상처를 받을 수 있다. 실존은 곧 존재가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방을 얼마나 수용하고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하지 말아야 할 말'임이 결정된다. 우리는 어설프게라도 자기만의 방법으로 감정을 노출하고 살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관계 속에서 다양한 삶의 경험으로 또 다른 삶의 영역을 만들어간다. 그런 과정 중에는 아픔도 고통도 상처도 그 어떤 것도 필요치 않는 경험은 없다. 그것이 자신의 삶에 디딤돌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긍정적 사고 덕분이다.
'하지 말아야 할 말'도 있지만 굳이 '하지 말아야 할 말'도 없다.라는 것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 우리는 신용할 수 있고, 믿을 만한 사람에게 ‘책임감 있다’라는 명칭을 붙인다. 거기에는 자신이 고의적이든 임의적이든 내뱉는 말에 대한 의식적인 책임도 포함된다. 말에는 법적, 경제적 혹은 도덕적인 책임을 포함하고 있다. 철학자 사르트르는 “책임감을 가진다는 것은 일이나 사물에 대하여 명백한 장본인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책임감”은 원작자를 의미한다. 우리 말 속담에도 ‘말 한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고 했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에게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의 의미 속에는 ‘자유하지 않는 한 책임성의 개념은 의미가 없다.’ 즉 스스로 속박되어 있거나 억압이 많은 사람일수록 비난의 말을 쏟아낸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대로 스스로 자유로운 사람은 자신이 하는 말에 책임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없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정의 말은 상대방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고 긍정의 말은 상대방을 살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