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는 우리 땅, 영웅바위는 당진 땅 ①

풍랑이 거센 영웅바위
풍랑이 거센 영웅바위
영웅바위에서 바라본 서해대교
영웅바위에서 바라본 서해대교

역사 속 숱한 애환을 간직한 당진의 영웅바위(당진시 신평면 매산리 앞바다)가 지난해 6월 당진의 향토유적으로 지정됐다.

당진의 향토유적이라 함은 영웅바위가 당진에 속한 당진의 보물임을 입증한 것이다. 하지만 영웅바위는 최근 경기도와 충남도 간 도계분쟁에 휘말려 불우(不虞)의 수난을 당하고 있다. 이 바위가 이름처럼 당진의 ‘영웅’역할을 하려면 오랜 세월 당진의 앞바다를 지켜온 수호신임을 만방에 알려야 한다. 태평양 한 가운데 홀로서서, 늠연한 모습으로 대한민국을 지키고 있는 독도처럼 영웅바위도 당진땅을 수호하기 위해 외로운 투쟁을 벌이고 있다.

당진 땅에 대한 권리와 수호의무는 당진시만이 나설 문제는 아니다. 충남도가 당진시를 품고 있기에 당연히 충남도민 전체가 나서 영웅바위를 지켜야 한다. 3회에 걸친 영웅바위 재조명작업을 통해 영웅바위가 분명한 당진 땅임을 입증하고 당위성을 확보하고자 한다.(편집자)

(고대 역사 속 영웅바위···삼국시대 최초 당진 면천 땅으로 기록)

영웅바위는 충남 당진시 송악읍 한진포구길 49번지에 있는 한진포구(한진나루) 동쪽 3.1km 지점에 있는 웅장한 바위다. 당진시는 영웅바위를 당진시 신평면 매산리에 속한 바위로 보고 당진시 향토유적으로 지정한 바 있다. 객관적으로 보면 평택시 포승면과 당진시 송악면 사이 바다에 솟아있는 높이 15m, 둘레 60m의 바위다. 영웅바위를 멀리서 보면 중앙에 돛대처럼 불뚝 솟은 거대한 입석이 있고 주변에 낮은 바위들이 울퉁불퉁 일어나 마치 위대한 장수가 수많은 병졸들을 거느린 병영처럼 보인다.

영웅바위가 기록으로 처음 등장한 시기는 삼국시대다. 당시 영웅바위는 대진(大津)에 속했다. 대진은 글자 그대로 ‘큰 나루’라는 의미로 흔히 대진나루로 불린다. 1871년 간행된 임하필기 제13권 연해정관편에 따르면 대진은 서남쪽으로 1백리이며 넓이가 10여리인데 조세(潮勢)가 사납다. 대진 중류(中流)에 영옹암(令翁巖)이 우뚝 서있는데 높이는 1백척 가량된다. 만조(滿潮)때 배로 건너면 홍주(洪州), 면주(沔州) 등 여러 읍으로 통하는 첩로다. 임하필기는 신라인 모두가 숙관(?館 )으로 나아가 당나라에 조공을 한 이유로 ‘대진’이라는 지명이 생겨났다고 기록했다.

백제 땅에 속했던 대진은 혜군의 가리저에 속했고 수군창(해군의 창고)이 설치될 정도로 물동량이 많았던 곳이다. 이후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고 경관이라고 불리며 이곳에 객관과 곡식을 쌓아두는 대단위 창고를 만들었다. 당나라와 신라의 사신 및 상인들은 이곳을 통해 외교와 교역을 했다.

대동지지(당진편)에 기록된 ‘백제 의자왕 20년(660)에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군대를 덕물도(德勿島)에 머문뒤 당진에 정박해 육지로 상륙했다’는 내용을 볼 때도 백제 벌수지현 때부터 당진이 당나라와 해상통로 역할을 해왔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송나라와도 교류를 했으며 고려황제가 이곳에 관을 두고 사신들을 접대했다. 따라서 대진은 삼국시대 대당교역의 중심지였고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증명한다. 당진과 면천, 서산, 태안 등 충남 서해안 일대의 여러 고을들도 이곳을 통해 활발한 교역활동을 벌였다.

대진에 이르기 위해서는 대진 앞바다에 떠 있는 영웅바위를 필히 거쳐야 했다. 하지만 고래로 영웅바위 근처는 조류가 거세 수시로 풍랑이 일었다.

신라 진성왕 7년, 당에 조공을 가던 사신 김처회(金處誨)가 바다에 익사한 사건이 있었다. 병부시랑 김처회는 정절(旌節/사신이 들고 가던 의례의장)을 들고 당으로 가다가 바다에 익사하였는데 관할하고 있던 혜군(槥郡/槥城郡)의 태수 김준을 보냈다. 혜군 내지 혜성군은 지금의 서산 면천이다.

신라의 삼최(三崔/최치원, 최승우, 최언위)로 꼽히며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알려진 최치원이 지금의 부성군(서산시)태수로 있을 때도 혜군, 즉 대진나루를 통해 당나라와 교류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대진이 백제시대 현(縣)이름인 ‘가리저(可里渚)’에 속했다는 기록과 가리저는 ‘혜군’과 동일한 지명이며 혜군이 대진인 당진의 면천이라면 영웅바위는 삼국시대부터 당진에 속했던 것임에 틀림이 없다. 고려시대의 가리저 역시 지금의 충남 당진군 합덕읍 성동리를 지칭한다는 기록(규장각 소장 1872년 수원부 지도 하단 대진유래 주기)이 있다.

다만, 그렇게 알고 쓰이던 당진의 대진이 조선말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지금의 평택시 포승읍 만호리를 대진으로 표기하고 당진의 한진은 누락시켜 오늘날 도계분쟁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또 조선중기 문신인 이식 등 여러 시인문사들의 시와 신동국여지승람 등을 인용해 대진을 평택과 당진이 공유해서 사용했으며, 심지어 대진의 배후지역을 평택시 수리골(안중읍 용성리)이라고 주장하며 영웅바위와 평택을 억지로 연결지어보려는 경기도의 움직임도 있다.

하지만 대진과 영웅바위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시대이며, 그 기록들은 한결같이 대진을 당진의 면천에 속한 지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시대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영웅바위는 평택보다 당진에 속했다는 기록이 압도적이다. 그리고 현재 영웅바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는 곳은 충청남도 당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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