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아산시의회 김희영 부의장…7식구 단칸방, 처절한 노동운동, 보험영업까지
부의장 임명 과정 후유증, 풀어야할 과제…“닉네임 '아산댁'에 걸맞는 의정활동 각오”

아산시의회 김희영 부의장. <디트뉴스>와 만난 그는 원구성 과정에서 발생한 여·야 갈등을 푸는 과제와 함께 생활정치인으로서 인정받고 싶은 의지를 내비쳤다. 

충남 아산시의회 8대 후반기 부의장실은 여·야 갈등의 흔적이다. 기존 부의장실은 야당(국민의힘) 의원들이 자신들의 사무실로 사용하겠다며 차지했고, 어쩔 수 없이 의원사무실 한 공간을 새로 꾸며 사용 중이다.

부의장실 이전은 후반기 부의장직을 둘러싼 여·야 대립이 원인이 됐다. 그 중심에는 김희영(53) 부의장이 있다. 그는 제225회 임시회를 앞두고 <디트뉴스>와 만난 자리에서 가장 큰 고민으로 여·야 갈등 해소를 꼽았다.

“본래 부의장직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던 게 아니라, 원구성 협의 과정에서 여기까지 흘러왔어요. 이 갈등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매일 고민합니다. 어느 시기가 되면 자연스레 풀리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코로나19로 대면기회가 적어지고 고리가 안 풀리고 있어요. 난상토론을 통해서라도 합의점을 찾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현재로서는 뚜렷한 방법이 없다. 당사자인 만큼 시민들에게 하루빨리 갈등과 반목에서 벗어난 시의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누구보다 간절하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는 ‘변절자’라는 오해와 늘 싸워야 했다. 

당진에서 가난한 어부였던 부모님 슬하 2남 3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난 김 부의장. 7식구가 서울 가리봉동 쪽방에서 지내야 했다. 주인이 내려올 때면 눈치를 보며 다락방에 숨어야 했던 어린시절이 생생하다. 

소녀 김희영은 우유·신문배달 등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돈이 없어 실내화 대신 검정 덧신만 신어야 했고, 공장에 다니는 언니들이 출근하면 남은 남동생 두 명을 돌보는 건 그의 몫이다. 그와중에 중학교 때부터 반장을 맡아왔다. 앞에 나서는 유전자는 이때부터 두각을 보인 듯하다.

당연히 대학은 꿈도 못 꿨고 노동운동으로 유명했던 삼성제약에 취업한다.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에 감동을 받아 노조에 가입했고, 밤엔 또래 대학생들을 만나 민주화 운동에 동화됐다. 1988년, 전임 노조위원장이 구속되며 대행을 맡는다. 이후 5년간 노조를 이끌면서 20대의 청춘을 태웠다.

그의 왕성한 활동력은 가난한 어린시절과 노동운동, 보험영업까지 치열했던 생존 전쟁을 거치면서 키워진듯 하다.
그의 왕성한 활동력은 가난한 어린시절과 노동운동, 보험영업까지 치열했던 생존 전쟁을 거치면서 키워진듯 하다.

“60일간 항쟁에서 회사가 물과 전기를 끊고 동지들이 탈진해 쓰러졌어요. 막바지에는 마실게 없어서 오줌을 마실 정도로 처절했죠. 지금은 웃기지만, 공권력이 투입돼 노조를 해산했던 당시 최루탄에 맞아 병원에 입원했어요. 언론에도 나올 정도로 떠들썩 했는데, 정작 전 아무렇지 않게 퇴원했답니다.” 

그의 노조활동은 결혼 후 둘째를 임신했을 때까지 계속됐다. 하지만 아이와 산모의 건강을 걱정하는 가족의 만류에 후배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일선에서 물러난다. 이후 셋째를 낳고 보험회사에 다니던 사이, 후배가 이끌던 노조는 흔들렸고 현장에서 함께 피땀 흘리던 동료는 그에게 ‘변절자’라며 책임을 물었다. 지금 떠올려도 가슴이 시리다.

보험회사에 들어가 새벽 4시면 동네문 시장에서 짐을 날라주고 박카스와 명함을 돌리면서 얼굴도장을 찍었다. 당시엔 빛을 보지 못했지만, 이 경험은 2000년 아산에 이사 온 뒤 진가를 발휘한다. 아침 일찍 방문한 가게에서 소금을 맞고, 모텔촌을 영업하면서 ‘마누라 단속 잘하라'는 말을 들었다는 남편의 속앓이를 들으면서 발품을 팔았다. 결국 1억 원대 연봉자가 된다. 

김 부의장의 생활력과 추진력은 생계전선 외에서도 발휘된다. 학교운영위원회를 거쳐 녹색어머니회 아산지회장, 충남연합회장, 중앙사무국장까지 영역을 넓혔다. 이때 봉사와 정치의 교집합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2013년 그의 왕성한 활동력을 눈여겨 본 복기왕 전 아산시장의 추천으로 민주당 비례대표를 받아 제7대 아산시의회에 입성한다.

문제는 선거구가 분구 되면서 발생한다. 아산 을 선거구에 편입된 그는 강훈식 국회의원의 추천으로 지역위원회 사무국장을 맡게 된다. 도내 유일한 여성 사무국장이었다. 적지 않은 반대 속에서도 특유의 털털함과 친화력으로 을 지역위원회에서 자리를 잡아가지만, 역으로 갑 지역위원회에서는 ‘배신자’로 낙인찍혀 가슴앓이를 하게 된다. 

“2018년 지방선거 때 갑 지역위원회에서 배신자라는 소리를 듣게 됐어요. 많이 힘들었죠. 그래도 전 선거사무실 개소식 때 모두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정치적 아버지는 입문하게 해준 복기왕, 자양분을 준 강훈식 두 분이라고. 시민단체에서도 비슷한 상황을 겪었어요. 의원이 되기 전 함께 활동할 땐 몰랐는데 막상 제도권 내에서 살펴보면서 문제를 발견했죠. 관련 예산을 삭감하는 과정에서 소관 상임위원장이다 보니 원망을 많이 들었어요.”

아산에 정착한 지 20년. 김 부의장은 닉네임 '아산댁'에 걸맞는 의정활동을 약속했다.

부의장이 된 지금, ‘갈등의 씨앗’이라는 주홍글씨를 벗는 과제와 함께 정치인 ‘김희영’의 가치를 입증하는 일도 중요하다. 코로나19로 많은 구상이 제한을 받고 있지만 꾸준히 준비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다.

“코로나19가 잦아들면 의회 차원에서 ‘찾아가는 민원창구’를 운영하고 싶어요. 정례적으로 시민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민원처리체계를 구축하는 거죠. 또 코로나뿐 아니라 수해, 태풍 등 극복 과정에 대한 백서를 발간하고 지역 맞춤형 대응메뉴얼을 개발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기회가 되는대로 집행부에 제안하려고 준비중이예요.”

끝으로 그는 ‘생활정치인’으로서 약자의 편에 서겠다고 말한다. 누구보다 복지사각지대의 어두움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놓았던 배움의 끈도 다시 잡고 있다.

“배움에 대한 갈증이 남았나 봐요. 학점은행제로 사회복지 공부를 하고 있어요. 부족하지만 주민의 일꾼으로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불들, 행정의 문턱이 높게 느껴지고 손길이 필요한 분들, 소리를 내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아산댁’이라는 닉네임에 걸맞는 의정활동을 보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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