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IN충청-⑱]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영화
대전 시내 곳곳에 남은 지영이 흔적 찾기

영화 '82년생 김지영' 스틸컷. 주인공 지영이 사는 '집' 공간은 대전정보문화산업진흥원 스튜디오에서 촬영됐다. (사진=봄바람영화사)
영화 '82년생 김지영' 스틸컷. 주인공 지영이 사는 '집'은 대전정보문화산업진흥원 스튜디오에서 촬영됐다. (사진=봄바람영화사)

전국의 지영이들을 울렸던 영화 <82년생 김지영>.

2019년은 여성 서사를 주축으로 한 상업영화의 흥행이 본격화된 해다. 그 중심에 선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서사 축을 지탱하는 대부분의 장면이 대전에서 촬영됐다는 점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중 하나다.

영화는 산후우울증을 겪고 있는 지영(정유미 역)과 그를 둘러싼 가족, 현실 사회의 모습을 관찰해 나간다. 극중 지영은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광고기획사를 다니던 직장인이었지만, 대현(공유 역)과 만나 결혼한 후, 딸 아영을 낳은 뒤 경력단절여성이 된다. 

스크린 속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장소는 지영의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이다. 이 공간에서 그는 아이를 돌보고, 빨래를 하고, 해가 지는 모습을 보고, 퇴근한 남편과 식탁에 마주 앉는다.

대학을 졸업하고, 열심히 직장생활도 했지만 결국 누군가의 아내, 엄마로 굳혀진 삶. 사방이 벽으로 꽉 막힌 집 안에서 내다보는 창문 밖 풍경은 지영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의 공허한 눈빛을 따라가다 보면, 맞은편 아파트 창문 안의 또다른 지영의 삶을 짐작하게 될 뿐이다.

대전 유성구 도룡동에 위치한 대전정보문화산업진흥원 건물 전경. 지난해 총 36편의 장·단편 영화, 드라마의 로케이션 촬영이 이곳 스튜디오에서 진행됐다.
대전 유성구 도룡동에 위치한 대전정보문화산업진흥원 건물 전경. 지난해 총 36편의 장·단편 영화, 드라마의 로케이션 촬영이 이곳 스튜디오에서 진행됐다.

지영의 집 내부는 유성구 도룡동에 위치한 대전정보문화산업진흥원 스튜디오에서 촬영됐다. 정보문화산업진흥원은 대전시 출자·출연기관으로 영상과 정보(IT/SW산업), 문화콘텐츠(게임, VR/AR, 만화·웹툰 등) 산업을 지원·육성하는 재단법인이다.

대전영상특수효과타운 내에 조성된 촬영 스튜디오는 높이 18.9m로 국내에서 가장 효율적인 공간 형태를 갖췄다. <82년생 김지영>을 포함해 지난 한 해에만 총 36편의 장·단편 영화, 드라마 로케이션 촬영이 이뤄졌다.

지영의 친정집은 진흥원 B스튜디오에서 촬영됐다. 친정집 신은 ‘가족’이라는 관계를 통해 지영이 오랜 시간 겪어온 뼈아픈 현실을 보여준다. 아버지가 지영과 지영의 언니, 막내 남동생을 대하는 모습이나 지영의 고모들이 마주앉아 나누는 대화에서 뿌리 깊은 성차별 인식을 엿볼 수 있다. 

딸 지영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한걸음에 달려온 엄마 미숙의 모습이 담긴 영화 스틸컷. (사진=봄바람영화사)
딸 지영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한걸음에 달려온 엄마 미숙. 영화 스틸컷. (사진=봄바람영화사)

원작 소설에는 없는, 영화적 상상력이 가미된 명장면도 이곳 스튜디오에서 탄생했다. 엄마 미숙은 딸이 우울증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온다. 

딸을 위로하고 돌아가려는 뒷모습을 향해 지영은 나직이 ‘미숙아’ 하고 엄마의 이름을 내뱉는다. 지영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외할머니로 빙의하는 장면이다. 

지영의 목소리를 빌어 미숙에게 전해진 ‘사과’는 곧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비슷한 삶의 터널을 통과해온 한 여성이 같은 여성에게 건네는 위로이기도 하다. 동시에 82년생 지영의 삶이 한 세대를 뛰어넘어 조부모 세대인 32년생 여성의 삶과 아직도 닮아있다는 현실을 깨닫게 되는, 서글픈 자화상이기도 하다. 

씁쓸한 ‘명절 풍경’ 영화는 현재진행중

대전 유성 도룡동 연구원현대아파트 전경. 1989년 준공된 아파트로 주변 녹음이 푸르다. 영화 속 지영의 남편인 대현의 부산 본가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대전 유성 도룡동 연구원현대아파트 전경. 1989년 준공된 아파트로 주변 녹음이 푸르다. 영화 속 지영의 남편인 대현의 부산 본가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남편 대현의 부산 집은 도룡동 연구원현대아파트에서 촬영됐다. 이 아파트는 3개 동, 150세대 규모로 1989년 10월 준공됐다. 인근에 새로 지어진 아파트와는 다른,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는 가정집으로 표현됐다. 영화 속에선 총 두 차례 이 집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영화 초반 남편 대현과 마주하는 장면을 제외하고, 지영의 우울증 증세가 공개적으로 드러난 신은 서사에서 큰 파장을 일으킨다. 명절을 맞아 부산 시댁을 찾은 지영은 하루 종일 일을 거들고, 다음날 새벽같이 일어나 다시 부엌으로 향한다. 지영의 손에 쥐어진 건, 두 단의 '시금치'다. 

대현의 여동생 부부의 등장은 아침상을 치우고 친정으로 떠나려는 지영의 발목을 붙잡는다. 자신의 딸이 집에 오자 시어머니는 지영에게 음식을 내오라 시키고, 지영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모친에게 빙의돼 하소연을 늘어놓는다.

“사부인, 저도 제 딸 보고싶어요. 그 집만 가족인가요? (중략) 그 댁 따님이 집에 오면, 저희 딸은 집으로 보내주셔야죠. 저도 우리 딸 보고 싶어요.”

늦은 밤이 돼서야 친정에 도착한 지영은 가족들의 얼굴을 볼 틈도 없이 기절하듯 잠이 든다.

대전 서구 괴정동 KT인재개발원 1연수관 전경. 이 건물 1층 강의실에서 남편 대현의 회사 워크숍 장면이 촬영됐다.
대전 서구 괴정동 KT인재개발원 1연수관 전경. 이 건물 1층 강의실에서 남편 대현의 회사 워크숍 장면이 촬영됐다.

전 직장의 상사와 다시 인연이 돼 복직을 결심한 지영은 남편 대현으로부터 육아휴직을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대현의 모친은 부산 집 거실에서 며느리인 지영과 통화하던 중 이 사실을 알게 되고, 버럭 화를 낸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아를... 어떻게 그리 생각이 짧노.”

남편 대현의 회사 워크숍 장면도 대전에서 촬영됐다. 

워크숍에선 직장 내 성희롱 예방 교육이 실시되고 있다. 대현은 아내 걱정에 강사의 농담에도 웃질 못한다. 이 시간 지영은 어린 딸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친정으로 향하고 있다. 

워크숍 장면 촬영 배경은 서구 괴정동 KT인재개발원이다. 정문을 지나 오른편에 보이는 첫 번째 건물인 1연수관 1층 강의실에서 촬영됐다.

인재개발원은 교육·연수시설로 연수관과 실습관, 운동장, 벤처타워 등의 공간으로 조성돼있다. 잘 정돈된 잔디광장과 산책로가 있어 최근까지 웹드라마 촬영지로도 활용됐다.

KT인재개발원 분수대 전경. 남편 대현이 워크숍 쉬는 시간 동료들과 모여 육아휴직 신청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KT인재개발원 분수대 전경. 남편 대현이 워크숍 쉬는 시간 동료들과 모여 육아휴직 신청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남편 대현이 워크숍 쉬는 시간 동료들과 커피를 마시는 장면도 인재개발원 분수대 앞에서 촬영됐다. 아내 소원대로 육아휴직을 써야하나 같은 고민을 하는 대현 동료. 이 장면에서 또다른 동료는 육아휴직을 쓴 남성 직원이 결국 눈치 보며 퇴사하게 됐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82년생 김지영>의 대전 촬영은 지난해 2월 초부터 3월 초까지 1개월에 걸쳐 진행됐다. 같은해 10월 23일 개봉해 367만 명의 관객 수를 기록했다. 

영화는 소설과 영상, 예술 속에서 또 다른 지영의 형태로 여전히 재생산되고 있다. 영화로 촉발된 새로운 시대정신이 변화를 거듭하며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해지는 모습을 보면, 가끔 가슴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모든 지영이들에게. 영화는 막을 내렸지만, 끝나지 않은 엔딩 크레딧이 여전히 잔물결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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