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선공원에서 주민들과 만나고 있는 장종태 대전 서구청장(가운데). 자료사진.

1992년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른바 ‘한준수 양심선언’의 주인공 한준수 전 연기군수가 금년 초 타계했다. 그해 총선에서 노태우 정권의 관건선거 개입 사실을 폭로했다가 관직에서 쫓겨나며 구속까지 됐던 인물이다. 양심선언 때문에도 정치적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고, 필자는 고인을 취재해본 적은 없어서 잘 알지 못하지만, 충남도청 근무 시절 한 전 군수를 모셨다는 그의 후배 Y씨를 통해 얼마 전 알게 된 ‘둔산개발 일화’는 소개하고 싶다.

그 후배는 공직 선배이자 상관이었던 한 전 군수의 타계 사실을 요즘에서야 알게 되어 무척 아쉽다면서 사라질 뻔했던 남선공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요지는 둔산의 남선공원이 남아 있는 것은 전부 고인의 공이라는 것이었다. 탄방동에 위치한 남선공원은 자연지형을 살리지 않는 개발방식으로 조성된 둔산 신도시가 품고 있는 유일한 자연근린공원이다. 

‘남선공원 밀어버리는 계획’에 반기든 도청의 두 전사

사연은 이렇다. 1980년대 말 대전시는 광역시가 아닌 보통시로서 둔산 개발을 추진했다. 한 전 군수와 후배는 대전시의 상급기관인 충남도에서 도시계획 업무를 맡고 있었다. 고인은 과장으로 있었고 후배는 실무 담당자로 한 과장을 모시고 있었다. 둔산개발계획 업무는 대전시와 건설부 두 곳에서 모든 걸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남도는 중간에서 전달만 해주는 역할이었다. 그런데 계획이 확정될 즈음 후배는 도면을 살펴보다가 남선공원(당시는 둔산 들판에 솟아있는 보통산)을 밀어버리는 것으로 계획 중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고민에 빠졌다.

후배는 “직접 남선공원 현지를 방문해 보니 임상(林相·산림의 상태)이 무척 좋았다”고 한다. 그는 과장에게 보고하면서 “산을 밀어붙이면 안 된다”는 의견을 냈다. 한 과장은 며칠을 고민하더니 답을 내렸다. “Y형(후배 지칭), 함께 싸우세! 그냥 말 수는 없지!” 도청 윗선에도 문제점을 알리고 싸움을 시작했다. 남선공원은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을 대전시에 전달하자 일개 도청 과장이 웃긴다는 반응이었다. 건설부와도 얘기가 다 끝난 일인데 도에서 왜 나서느냐는 뜻이었다. 건설부에서도 “도청은 (서류를) 그냥 올려만 달라”고 요구했다.

남선공원을 없애는 방식으로 추진하는 대전시와 건설부의 입장에도 일리는 있었다. 갑천 쪽 저지대를 메우는 데 많은 양의 토사가 필요했다. 남선공원의 흙을 거기에 쓸 요량이었다. 그러나 200만 평이 넘는 신도시를 조성하면서 죄다 밀어버리고 자연공원을 한 개도 남기지 않는 방식은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둔산에 들어와 살 사람들을 생각하면 반드시 보존해야 할 산이었다.

한 과장은 “도시의 품격을 위해선 절대 안 된다”고 버티면서 이 업무를 함께 진행하는 토지개발공사와 설계업체 관계자들을 도청으로 불러들여 따졌다. 남선공원을 지켜내려는 충남도의 ‘두 전사(戰士)’는 위로는 건설부와 아래로는 대전시와 싸웠다. 하버드 출신이 대표로 있는 설계업체와 토지개발공사도 건설부 편이었다. 옥신각신하며 시간이 흘렀다. 대전시와 건설부는 한 시가 바쁘다며 빨리 넘기라고 성화였다. 한 과장이 고집을 굽히지 않자, 토지개발공사 설계업체가 “우리가 포기하겠다”며 입장을 바꿨다. 남선공원이 살아남는 순간이었다.

남들은 모르는 ‘공직의 맛’

당시 한 과장과 후배는 둔산에 손바닥만한 땅도 없었다. 그 일을 담당한 공무원으로서 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남선공원은 한 과장에게도 후배에게도 공직자로서는 더 없는 보람이었다. 사실 이런 게 진정한 ‘공직의 맛’이 아닌가 한다. 남선공원을 살리느냐 마느냐 하는 정도의 일은 갑부나 대기업 임원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오직 공직자라서 가능한 일이다. 언론도 시민단체도 이런 역할을 할 수는 있으나 최종적으로는 담당 공무원의 손을 거쳐야 현실이 된다. 

공무원은 비록 직급은 낮더라도 좋은 아이디어를 내서 반영되면 그 일은 ‘자신의 업적’이 된다. 작은 다리 하나를 놓고 도로를 내는 경우에도 아이디어를 내고 헌신했다면 작지 않은 보람이 될 수 있다. 그 일을 해낸 공무원이 느끼는 자부심은 망외의 소득이다. 공무원 역시 여느 회사 직원과 같은 샐러리맨이 분명하지만 이런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공무원을 흔히 머슴으로 부르지만 일의 보람으로 치면 오히려 주인이 분명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혼자서 이렇게 주인 노릇을 하는 공무원들이 지금도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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