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의 눈] 도덕적 호의와 책임윤리

제주도는 지난해 주민 민원을 이유로 레미콘 제조업체 공장 설립 승인을 번복하면서 소송에 휘말렸다. 업체 측은 부당한 행정 처리를 주장했고, 제주도는 1심에서 패소했다.

울산 북구도 수 년 간 법정 싸움을 이어가야 했다. 지역경제 여파 등을 이유로 대형 유통업체 건축 허가 신청을 여러 차례 반려한 것이 문제가 됐다. 당시 구청장은 벌금형 선고에 더해 업체에 5억 여 원의 손해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물론 북구 예산이 쓰였다.

이후 북구는 낙선한 전 구청장에게 직권남용 책임을 물어 구상금 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전 구청장은 집까지 처분해야 할 위기에 처했다. 당사자는 올해 6월 시민사회단체와 주민들이 북구의회에 요청한 구상금 면제 청원 호소가 받아들여져 가까스로 구제받을 수 있었다.

행정이 절차와 원칙을 어기면서까지 선한 의도에 매몰될 때, 때로 우리는 사회적 비용과 대가를 치러야한다.

소송비용 미회수 사안은 상급기관 감사 단골 소재다. 패소자 부담 원칙상 소송비용을 청구하지 않으면 혈세를 낭비한다는 비판이 따르기 때문. 최근 이 원칙이 일괄 적용돼선 안 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데, 이는 ‘공익소송’에 국한된 논의다.

세종시의회는 이번 임시회에서 세종시교육청을 상대로 한 학부모 행정소송 패소 소송비용 면제 청원을 채택했다. 시교육청은 사실상 법원의 판단과 별개로 소송비용 회수를 철회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의원들은 시교육청 공무원을 상대로 “상위법 우선 원칙을 적용해야 할 사례라고 보느냐”, “정무적 판단을 하지 말라”, “기관이 패소하면 자체 예산으로 메꾸면서 개인에게 소송비용을 부담시키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초법적 논리를 폈다. “의회 입장을 존중하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해주길 바란다”는 무언의 압박은 덤이었다.

하지만 의회 검토 보고서에는 이와 정반대로 “교육환경평가 심의 결과를 수용한 것은 적합하다고 판단됨”, “법에 따라 학생들에게 소송비용을 청구한 것은 적법한 행위로 사료됨”, “교육청은 법률적으로 정당하게 확보된 채권을 포기해야 할 이유가 없고, 법원의 판결을 근거로 소송에 소요된 비용(채권)을 회수하는 것은 정당한 권리이기 때문에 소송비용을 면제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는 것으로 사료됨”이라고 적시했다.

의회 고문변호사도 “의결로 채무를 면제하는 것은 상위 법률의 입법 취지와 배치되는 것이므로, 그 위법성을 고려할 때 채택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는 검토 결과를 내놨다.

다만, 상임위는 세종특별자치시 교육·학예에 관한 소송사무처리 규칙 제24조 ‘교육감이 특히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소송비용확정결정신청을 아니할 수 있다’는 내용을 들어 재고하라는 의견을 냈다. 청원 채택에 따른 책임을 고스란히 다시 행정청에 넘긴 셈이다.

정치 바이블로 불리는 막스 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를 떠올린다. 올해는 그가 사망한 지 딱 100년이 되는 해다.

베버는 자신이 죽기 1년 전 한 강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책임윤리를 따르는 사람은 자기 행위의 결과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길 수 없다.”

그는 정치인에게 필요한 두 가지 윤리로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언급했다. 전자가 도덕적 선을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자신의 결정으로 인한 결과를 책임지는 태도다. 덧붙여 베버는 정치 영역에서 나타나는 치명적인 죄악으로 ‘객관성의 결여’와 ‘책임성의 결여’를 강조했다.

소송 비용이 크지 않고, 이번 청원 채택이 교육당국과 학부모 간에 일어난 감정싸움에 대한 위로나 갈등 봉합이 목적이었다면, 다른 차원의 방안도 있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파트 건설이 끝날 때까지 학교와 학부모, 교육청이 참여하는 협의체를 구성하겠다든지, 상임위 차원에서 주기적 현장 점검에 나서겠다든지, 소송은 패소했지만 공익적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조례 제·개정에 반영하겠다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정치인이 초법적 권력을 가진 자가 아닌 주민들과 평등한 관계에서 고민할 때, 행정이 주어진 권한 범위 안에서 최소한의 원칙을 지켜나갈 때, 개인들이 행위에 따른 책임을 겸허히 받아들일 때 진짜 민주주의가 빛을 발할 수 있다.

선한 의도로 도덕적 호의를 베푸는 일, 시민들의 요구에 편승하는 것이 민주주의 시민이 기대하는 정치인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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