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용 칼럼]

대덕연구단지
대덕연구단지. 자료사진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가 평균 6.6배 성장할 때 한국은 350배 성장했다. G7을 G11으로 확대해 한국을 포함시키자는 얘기가 나올 정도가 됐다. 폭풍 성장의 원천을 따진다면 ‘과학기술’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대덕연구단지(대덕특구)는 우리의 오늘을 있게 만든 한국 과학의 메카다. 그런 연구단지를 품고 있는 대전시에게 ‘과학도시’라는 별칭은 이상할 게 없다.

연구단지가 우리나라를 살찌운 것은 분명하나 대전시가 연구단지 덕을 얼마나 봤는지 묻는다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연구단지가 대전시 덕을 본 게 무엇이냐고 묻더라도 마찬가지다. 대전시와 연구단지는 한 식구이면서도 남남처럼 지낸다. 서로 미워할 일도 기뻐할 일도 없는 관계다. 

대전시-연구단지, 서로 소 닭 보듯 하는 관계

대덕연구단지는 국가 연구단지이기 때문에 지방자치단체와 밀접하게 소통할 일이 많이 있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도 든다. 그렇다면 연구단지가 대전시 안에 있더라도 양쪽이 서로 소 닭 보듯 하는 게 오히려 당연하고 자연스런 일이다. 지금 대전시에게 대덕연구단지는 그런 존재다. 그러나 이런 관계가 정상이 아니라는 점을 대전시도 알고 있다.

대전시가 세계과학도시연합(WTA)을 창립해 20년 넘게 운영해왔다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국가 연구단지가 대전에 없다면 세계과학도시연합을 만들 이유가 없다. 대덕연구단지를 활용해 대전을 과학도시로 육성해보자는 뜻으로 만들었다. WTA 운영은 대전시가 과학도시로서 활동하는 거의 유일한 사업이다. 그런데 WTA의 존치 여부를 놓고 대전시가 고민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코로나19 때문에 올 10월 스페인에서 열릴 예정이던 금년 행사가 불투명해진 데다 비대면 문화 확산 등의 이유로 기구 해산까지 거론되는 것으로 <대전일보>는 보도하고 있다. 지금까지 대덕연구단지는 대전시에겐 있으나마나 한 존재였다는 점에서 보면 WTA 해산은 대수로운 일이 아닐지 모른다. 해산하면 한해 15억 원씩 들어가는 관련 예산을 절약할 수 있겠으나 대전은 과학과 더 멀어질 게 뻔하다. 해산이 불가피한 상황이라면 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스마트폰을 사용할 정도라면 세계 어떤 나라 국민들도 최고 기술의 삼성 스마트폰을 알고는 있다고 봐야 한다. 이들에게 그 기술의 탄생지가 대한민국 대전이라고 말해준다면 ‘과학도시 대전’을 쉽게 알릴 수 있다. 반도체와 휴대폰 강국 신화는 삼성 혼자 이룬 게 아니다. 그 배후에는 연구단지의 전자통신연구원(에트리)이 있다. 이런 정도의 연구단지를 둔 도시는 세계적으로도 많지 않다. 대전에겐 행운이지만 행운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대구 광주 등은 잘하는데 대전만 못하는 ‘판짜기’

에트리의 이순석 박사는 그 이유를 ‘판짜기’ 의욕의 부재로 설명한다. ‘디지털 건축가’로 불리는 그는 연구단지 소통 모임인 ‘새통사’(새로운 통찰을 생각하는 사람들)를 이끌고 있다.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전략을 그는 ‘판짜기’로 부른다. 중요한 것은 판을 짜는 사람이 정해져 있다는 점이다. 대전시가 원하는 사업이면 시에서 먼저 판을 짜서 연구원에 협조를 요청해야 하는데 대전시 사람들은 “(연구원에서) 대전을 위해 해줄 거 뭐 없느냐”고 묻기만 한다고 한다. 대전시 사람들은 판짜기를 안 한다는 말이다. 

대전시도 이런 소극적 태도를 인정한다. 언젠가 대전시의 한 공무원은 사석에서 이런 현상을 빗대, “시공무원들이 가끔 대덕특구 사람들과 업무협의를 하러 연구단지를 방문하지만 대덕대교를 넘어올 때 협의 내용을 다 잊어버린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순석 박사는 대전시장이나 시공무원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전의 행정 문화가 그런 것 같다고 말한다. 대전은 주인이 없고 머슴만 있는 도시 같다고 한다.

다른 도시들은 그렇지 않다. 연구원들이 귀찮을 정도로 부탁을 해온다. 어떤 도시는 도시 전체를 ‘자율자동차 테스트 베드’로 내주겠다며 매달리기도 한다. 대구나 광주 등은 열심히 찾아와서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며 조르는데 대전만 조용하다고 한다. 대전시가 연구단지와 남남처럼 지내는 이유가 밝혀진 셈이다. 대전시의 태도가 바뀌지 않으면 ‘과학도시 대전’은 앞으로도 헛구호에 불과할 것이다. 

WTA, 세계적 수준의 과학축제로 바꿀 수 없나

WTA는 다보스포럼 수준의 행사로 키울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봐야 한다. 2014년 대전에서 열린 세계인문학포럼은 이전 부산 행사보다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국내 최대 규모의 인문학 축제로 노벨상 후보자도 참석하면서 관중들의 열기가 뜨거웠다. 전문가들이 꼽은 성공 요인 중에는 대덕연구단지가 대전에 있다는 점도 있었다. 대전은 과학도시인 만큼 세계과학포럼 같은 행사를 시도해볼 수 있다. 

대전시가 카이스트와 함께 노벨 과학상 수상자 등을 초청하는 국제적 수준의 과학포럼을 연다면 과학도시 대전을 알리는 데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G7에 도전하는 세계 10위권 국가 한국의 과학메카 대전은 국제적 과학도시로 성장할 여건을 갖춘 도시다. 대전이 미래 경쟁력과 먹거리도 과학에서 찾는 게 우선이다. 대전시는 그런 노력을 거의 해오지 않았다. 노력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이젠 연구단지를 침범하고 훼손하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가 되었다. 연구단지 내 녹지에 아파트를 지으려하자 대덕단지 과학자들은 탄식하고 있다.

대전이 ‘4차산업특별시’라는 명찰을 달고 있으면서도 AI(인공지능) 사업은 광주가 가져가고 스마트시티 사업은 부산에 빼앗겼다. 대전의 정치역량만 탓할 수 없다. 연구단지 측 얘기를 들어보면, 대전의 미래를 위한 ‘판짜기’에 관심 없는 대전시 책임이다. 대전을 위한 판짜기라면 대전시장 책임이 가장 크다. ‘과학’을 가지고 제대로 판을 짤 수 있는 시장이 빨리 나와야 한다. 횡단보도 가로등 청소 등 대전의 생활환경을 첨단과학 실험장으로 해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행정수도 주변도시 전락 위기... 근본 해법은 ‘과학’

청와대의 세종시 이전 재추진 방침에 대전시장도 공주시장도 숟가락 얻기에 여념이 없다. 행정구역 통합이나 정부 기관의 분산 배치의 필요성은 있으나 그것이 지역의 미래를 결정하는 근본 요소는 아니다. 청와대가 세종으로 이전해 올 경우 세종과의 통합이 어려워진다면 대전은 행정수도의 주변 도시로 전락할 수 있다. 인천은 인구가 대구를 앞질렀으나 도시의 존재감은 대구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여전히 서울의 일개 주변도시일 뿐이다. 대전 인구가 세종보다 많아도 대전 자신의 색깔이 없다면 그런 처지가 될 수 있다. ‘세계적인 과학 도시’가 된다면 전혀 걱정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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