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트라시마코스의 나라로 가고 있나
[칼럼]트라시마코스의 나라로 가고 있나
  • 김학용
  • 승인 2020.07.03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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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용 칼럼]

‘정의(正義)란 무엇인가?’ 개인이든 국가든 정상적인 활동 주체라면 – 사고 능력이 없는 사람이나 국가가 아니면 - 종종 요구받거나 자문해야 하는 질문 가운데 하나다. 나라는 나라대로 개인은 개인대로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무엇이 옳은가’를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다. 오로지 돈을 제1의 가치로 치는 기업조차 정의를 외면하기 어려운 시대로 가고 있다. 페이스북의 저커버그는 트럼프 대통령의 적절치 못한 글을 방치했다가 곤욕을 치르고 있다.

시위자들을 ‘폭도’로 지칭하고 “약탈이 시작되면 총격도 시작된다”는 트럼프 글이 적절하지 못한 표현이라고 해도 그런 글조차 함부로 삭제해선 안 된다는 페이스북 오너의 의견이 옳은 것인지 여부에 대해선 이론이 있을 수 있으나 이 또한 정의에 문제임은 분명하다. 삼성의 이재용 사건을 놓고 구속과 기소 여부를 따지는 문제도 법 이전에 정의의 문제다. 

‘정의 문제’가장 적극적으로 다루는 정치

정의의 문제를 가장 적극적으로 다루는 직업 가운데 하나가 정치인이다. ‘정의’하면 법원과 판사가 먼저 떠오르지만 판사는 ‘정의롭게 판단하는 직업’에 불과하고, ‘정의’의 현실적 기준을 선택하고 규정짓는 직업은 정치인들이다. 정치인들은 사회적 현안이 새로 생길 때마다 법을 만들거나 바꾸는 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국회의원들이 법을 만들고 개정할 때는 마땅히 그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을 따라야 한다. 

문제는 정의의 기준이 사회 구성원마다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장삼이사들이 바라보는 정의는 크게 다를 바 없는 경우가 태반으로 보이지만 꼭 그렇지도 않는 게 정의의 문제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완전히 반대지만 어느 한쪽만을 정의로 보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고, 사형제나 인종차별 문제에 대해서도 입장이 정반대인 다른 사람들이 많다. 이런 문제들은 수도 없이 많다.

인천공한공사 보안검색원의 정규직 전환도 따지고 보면 그것이 ‘옳은 방법인가’하는 문제다. 어떤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평가는 달라진다. “좀 더 배운 사람이 필기시험 합격했다고 비정규직보다 임금 2배 받는 것이 불공정”이라는 김두관 의원의 말도 어떤 논리 어떤 시각에서 접근하느냐에 따라 시비가 달라질 수 있다. 김 의원은 그런 식의 채용도 문제가 없다는 말인데, 이를 ‘정의’의 관점에서 접근하더라도 설명할 방법은 나올 것이다. 물론 그 반대의 설명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어떤 행동이나 조치가 정의로운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쉽사리 답을 내기 어렵다는 점을 말해준다. 정치적 문제들은 더욱 그렇다.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란 트라시마코스 주장은 소피스트의 괴변으로만 여기기엔 너무나 현실적이며 강력하다. 이 말은 트라시마코스와 소크라테스와 대화에서 나왔다. 플라톤이 그의 ‘공화국’에서 ‘국가에게 정의란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했다. 트라시마코스는 소크라테스에게 양떼와 양치기를 예로 들어 ‘정의’를 설명했는데 옥스퍼드대 네틀쉽 교수는 다음과 같이 쉽게 해설했다. 

“국가의 통치자들은 양떼를 거느린 목동과 같은데, 양떼의 이익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이익을 챙기는 목동들이다. 정직하고 점잖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곤궁하게 산다. 그들은 버는 것이 적고 미움은 많이 산다. 강자의 이익은 정의가 아니라 불의다. 일상적으로 보는 작은 규모의 불의가 아니라 대규모의 불의가 강자의 진짜 이익이다. 사람들이 정의라고 부르는 것과 불의라고 부르는 것은 현실에서는 꼭 같은 것인데, 다른 관점에서 그렇게 기술할 뿐이다.”

정의(正義)와 불의(不義)는 구분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강자는 불의도 정의로 바꿀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트라시마코는 소크라테스에게 말한다. “소크라테스 선생! 이처럼 올바르지 못한 짓이 큰 규모로 저질러지는 경우에는 그것은 올바름보다 더 강하고 자유로우며 전횡적인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처음부터 말씀 드렸듯, ‘올바른 것’(정의)은 더 강한 자의 편익입니다.”

강자의 이익이 정의가 되는 나라로

트라시마코스의 정의론에 따르면, 똑같은 죄를 지은 죄인들을 수사해도 전 정권 사람을 수사하면 정의로운 좋은 검찰이고, 현 정권 사람들을 수사하면 정의롭지 못한 나쁜 검찰이 된다. 

전 정권을 대상으로 수사할 땐 박수치며 좋아하다가 – 그래서 검찰총장까지 시켜놓고 – 자기 정권 사람들 수사하니까 눈을 부라리며 나쁜 검찰이라고 욕하는 행위는 트라시마코스의 논리로 보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법무부 장관은 사건 수사에 관여할 수 없는 게 원칙이지만 정권의 이익에 부합한다면 원칙은 있으나마나다.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란 논리를 명징하게 부인하는 건 그리 쉽지 않다.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상식에 부합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올바르지 못함’(불의)이 ‘올바름’보다는 결코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논리로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을 꺾었지만 ‘강자의 이익’은 정의론에 대한 가장 강력한 안티테제였고 지금도 그런 힘을 갖고 있다. 법과 제도보다 권력자가 막강한 힘을 갖는 나라일수록 트라시마코스의 말은 힘을 갖는다. 

모든 정권에서 알게 모르게 트라시마코스의 이론이 적용돼 왔다고 볼 수 있다. 선거 때마다 국민들이 어느 한편의 손을 들어주는 것에도 그런 의미가 있다. ‘이젠 그대들의 당에서 내세우는 정의를 받아들이겠다’는 뜻이 어느 정도 포함돼 있다. 정권이 바뀌면 정책이 바뀌는 건 자연스런 일이다. 그러나 같은 비리사건을 대하는 태도까지 달라질 수는 없다. 유죄로 결론난 사건을 무죄로 뒤집고 불륜으로 처벌해왔던 사건을 로맨스로 돌리는 억지를 부릴 수는 없다.

문재인 정부는 역대 어느 정권보다 정의와 공정을 외치면서 탄생했다. 약속대로라면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로 가고 있어야 맞다. 그러나 그 반대다. 대한민국 정의는 거꾸로 가고 있다. 작금 대한민국은 트라시마코스의 정의론이 어느 나라 못지않게 잘 작동되는 나라다. 강자의 이익만 정의가 되는 나라로 가고 있다. 법치와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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