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국가에서 국회의장이란 자리가 갖는 의미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각종 국가 업무를 집행하는 정부를 견제하고 감독하는 대의기관의 수장으로서의 역할이다. 정부가 하는 일을 무조건 견제하는 게 전부는 아니지만, 감독과 견제가 국회의 기본 임무인 건 사실이고 국회의장은 그런 기관의 대표자로서 역할이 부여된다.

둘째, 국회의장은 국회 내의 각 정파 사이에서 공정한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하는 자리다. 어느 한 쪽에 치우치면 의회가 공정하게 운영될 수 없다. 정당 소속 의원이 의장에 당선되면 당적을 포기하고 무소속으로 남게 하는 것도 같은 취지다. 여야가 심하게 충돌할 때에도 의장은 중심을 잡아야 한다.

국가권력을 집행하는 기관이 정부라면 권력 집행에 문제가 없는지를 살피고 감독하는 곳이 국회고, 국회의 대표가 국회의장이다. 국회의장은 국회가 본연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해야 할 책무가 있다. 어느 나라든 국회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면 그 나라 정치는 죽어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대통령제 국가에서도 국회의장이 허수아비라면 그 나라에 정치는 없는 거나 다름없다.

국회의장의 권위는 그 나라 정치 수준과 비례한다. 국민들이 의회를 신뢰해야 국회의장도 대접받고 권위를 갖는다. 정치 후진국일수록 국회의장은 허수아비다. 우리나라 국회의장은 권위를 인정받지 못해왔다. 대통령의 하수인 취급을 받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대통령 입맛에 맞는 사람이 의장으로 ‘기용’되는 풍토에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젠 달라져야 한다.

거대 권력 맞서 어려운 길 가야 할 수도

대전 출신 박병석 의원이 국회의장으로 선출됐다. 의장 혼자 국회를 바꾸는 건 어렵지만 새로운 국회를 만들어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고 본다. 박 의장은 국회를 일신시키는 의장이 되었으면 한다. 역대 의장들의 전력과 정치 현실을 감안하면 쉽지 않은 일이나 ‘현실 탓’만 한다면 그 자리에 갈 이유가 없다. 

박 의장은 스스로를 ‘의회주의자’로 칭하면서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를 실천해낼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177석의 거여(巨與)와 100석도 안 되는 소야(小野) 사이에서 과연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당장 원 구성부터 새 의장의 솜씨가 시험대에 올랐다. 의회가 의석수로만 운영된다면 21대 국회는 정부와 여당 안을 무조건 통과시키는 ‘통법부’로 전락하면서 ‘의회주의’는 사망에 이르고 말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책무가 국회의장에게 있다. 국회의장이 ‘거대한 권력’에 고독하게 맞서야 하는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역대 많은 의장들은 이런 상황을 모면하는 데 급급해 하면서 국회의장이란 자리는 지켰지만, 의장의 권위는 떨어졌고 국회는 불신의 대상이 되었다. 박 의장은 달랐으면 한다.

박 의장은 ‘군주민수(君舟民水)’도 언급했다. “임금(정치인)이 배라면 백성은 그 배를 뒤집을 수도 있는 물”이란 뜻이다. 많은 국회의장들에게 물은 백성보다 임금이었다. 대통령의 신임을 잃을까 노심초사하다 의장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군주민수는 정치인들은 오직 국민만 보고 가야 하며, 박 의장 자신도 그렇게 하겠다는 다짐으로 들린다.

정치는 결국 의회를 벗어날 수 없고, 의회에서 대화와 타협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게 의회주의라 할 수 있다. 의회주의는 그 나라의 정치 수준이면서 민주주의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 아니다. 의회주의에서 보면 대한민국 정치는 심각한 위기다. 의회주의자 박 의장이 달라진 국회를 만들어보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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