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파라오와 피라미드의 나라, 이집트 기행⓶

그리스 풍의 필레신전. 거대한 나세르호가 조성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고 한다.

인류의 기원이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것처럼 인류 문명의 발상지 중 이집트의 문명은 그 연대가 가장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번 여행에서 인상적인 유적지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장관은 유유히 흐르는 나일강이었다. 강폭도 대단히 넓었지만, 그 길이만도 6853km, 유역면적도 아프리카 대륙의 10분의 1을 차지하는 이집트를 비롯한 아프리카를 길게 관통하는 강이었다. 그 강 위에서, 또 그 나일강을 따라서 이동하면서 이집트의 오랜 역사와 그 신비한 문명을 돌아보게 되었다.

5000년 넘는 역사 중 2300년 외세 지배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라는 말이 있듯이 강을 따라 이미 신석기의 문명(기원전5000년)이 싹트기 시작했으니 물경 7천 년 전부터 이집트인들의 삶의 궤적이 시작됐다는 게 학계의 중론이다. 

그렇게 시작된 이집트의 역사는 초기왕조시대(B.C 3050~2850년), 고왕국시대(B.C 2687~2191년), 제1중간기, 중왕국시대(B.C 2061~1751년), 제2중간기, 신왕국시대(B.C 1569~1081년), 제3중간기, 말기왕조시대(B.C 724~333년 페르시아지배기 포함), 그리스시대(B.C 332~31년)와 로마시대(B.C 30~337년)를 거쳐 641년 아랍군대가 이집트를 점령하면서 칼리프권력에 복종하던 옴미아드왕조, 아바스왕조가 이집트를 통치했고 1517년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 이후 1798년 이집트원정을 감행한 프랑스와 영국의 식민지배를 거쳐 1922년 명목상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긴 외세지배의 역사를 지닌 나라이기도 하다. 5천년에 이르는 찬란한 문명의 시기와 2천3백여 년이 넘는 외세지배의 역사를 지닌 나라가 바로 이집트인 것이다. 

오늘날의 이집트가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한 채 국민의 삶이 그다지 여유롭지는 못하지만, 채 열흘도 되지 않은 동안 돌아본 고대이집트의 유적은 과연 인류 문명의 발상지라는 말이 헛된 말이 아니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첫째 여러 신들을 모신 신전과 많은 파라오 무덤의 호화로움, 그리고 영혼 불멸을 향한 믿음과 그들이 남긴 상형문자를 비롯한 고대이집트문자, 고대왕국의 질서정연한 사회, 아울러 옛 이집트인이 남긴 숱한 예술적 조형물들은 고대 오리엔트문명의 기원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1922년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 1874-1939)에 의해 피라미드 형태의 사막에 세워진 ‘왕가의 계곡’에서 발견된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찾아낸 황금가면과 부장품은 지금 보아도 그 뛰어난 조형미와 황금으로 채색된 외관에서 황홀감마저 느끼게 된다. 

이미 3천여년의 파라오 투탕카멘(18세에 사망)의 황금마스크와 황금 펜던트의 모습에서 고대 이집트가 뛰어난 금 제련 기법과 상감기술을 지녔고, 이러한 기술을 이용해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살려 각종 건축물과 무덤에 묻힌 부장품을 제조했던 것을 볼 수 있었다. 카이로 박물관에는 마치 얼마 전 만든듯한 고대 이집트 왕국의 석상과 부도 등이 수없이 전시되고 있었다. 

 이집트를 관통해 흐르는 나일강은 찬란한 고대 이집트 문명을 탄생시켰다.

나일강과 이집트 문자 때문에 고대문명 가능

고대 이집트왕국이 강성하게 몇 천 년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가장 큰 이유는 나일강에서 찾을 수 있다. 

지중해 쪽의 하이집트(Lower Egypt), 누비아 쪽의 상이집트(Upper Egypt)를 관통해 흐르는 나일강은 5월경부터 에티오피아 고원으로부터 쏟아져 내리는 계절풍으로(함신) 인한 많은 비로 범람하는데 이때 영양소가 풍부하게 담긴 부식토가 공급돼 나일강 주변의 농토는 비옥해지고 밀을 비롯한 각종곡물이 풍성해질 수 있었다. 

필자 일행이 방문했을 때도 옥수수와 밀 등 여러 농작물이 수확되어 말과 소가 끄는 수레에 의해 운반되고 있었다. 이러한 나일강 주변의 옥토로 인한 잉여 농작물은 고대 이집트사회의 빠른 문명건설을 가능케 했고, 그 힘을 바탕으로 군사력을 키워 누비아와 에티오피아를 비롯한 이스라엘 등을 침략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탈리아의 작곡가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Aida)」는 이집트의 포로가 된 에티오피아의 공주 아이다와 이집트의 청년장군 라다메스(Radames)와의 비극적인 사랑을 주제로 한 것인데 이 오페라에서 이집트의 강성한 국가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이집트의 많은 신전에는 고대 이집트 문자가 새겨져 있다.  옛 이집트 문자는  신전 벽과 무덤의 벽화,도자기,부장품등 도처에 쓰여져  있다.

나일강의 풍성함과 함께 고대 이집트문명이 가능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이집트문자다. 오늘날 파피루스로 상징되는 옛 이집트문자는 상형문자 형태뿐 아니라 여러 문자가 쓰였는데 파라오의 신전 벽과 무덤의 벽화, 도자기, 부장품 등 곳곳에 쓰여 있다. 

이 문자들은 그리스 문자로 대체되기 전까지 이집트에서 사용되었는데 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국가 구도를 정당화하고 권위를 드러내며 종교에 의해 초월적 권위가 뒷받침되는 데 쓰였다. 이 문자를 사용해 기록을 남기는 서기는 이집트 사회에서 사제나 교관에 버금가는 명망과 권세를 누렸다고 한다. (한국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 이집트 문명전, 파라오와 미라<2009년>서 인용)

불가사의 피라미드, 수학과 과학기술의 산물

이 이집트문자를 해독한 사람이 바로 프랑스의 고고학자 J・F・샹폴리옹(J・F・Champollion 1790~1832)이다. 그는 나폴레옹의 이집트원정 때 가져온 로제타석(Rosetta stone)의 원문을 몇십년의 연구 끝에 해독해 냈는데 그때로부터 ‘이집트학’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고대 이집트 문자를 처음으로 해독한  프랑스의 학자 샹폴리옹.  이집트 문자가 해독되면서 이집트 고대역사의 비밀이  풀리기 시작한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이집트문자를 해독하면서 비로소 이집트 고대역사의 비밀이 풀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랜 문자의 기록을 통해 이집트는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고, 왕조사회의 질서를 지켜나갈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찬란한 문명을 건설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또 하나 고대 이집트문명의 위대함이 성립될 수 있었던 이유는 수학과 과학기술의 발달이다. 길이가 140M에 이르는 기자의 피라미드는 아직도 인류 고대문명의 7대 불가사의에 속한다. 

우선 그 규모의 장대함에서, 또 그런 엄청난 크기의 피라미드를 축조할 수 있는 기술은 고도의 수학적 계산과 과학기술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가능할 수가 없다는 게 후세인들의 지적이다. 이 피라미드 이외에도 아부심벨, 카르낙 등 거대한 신전을 쌓아 올린 고대 이집트인의 대리석등 돌의 축조기술 역시 치밀한 계산에 의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고대 이집트인의 유적에서 필자 일행은 그저 경탄에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헤겔이 왜 고대이집트를 ‘수수께끼의 나라’라고 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 아닐 수 없었다. 필라신전 앞에서 본 거대한 나세르(Nasser)호수를 보면서 필자는 과연 고대이집트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의문에 의문을 품었지만, 그 해답은 좀처럼 내리기 어려웠다. 석양이 지는 콤옴보신전 위에 비치는 조명 속에서 내려다 본 나일강의 표면은 정말 장관이었다. 고대이집트는 그렇게 신비 속에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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