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은 가득이심리상담센터 대표
박경은 가득이심리상담센터 대표

내 손에 무언가를 늘 움켜쥐고 있다면 손의 기능은 사라지고 만다. 어쩌면 조금씩 소멸되고 있는 기능을 느끼지도 못한 채 더 움켜쥐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사람관계에서 오는 욕망이고 물질에 대한 탐욕이다. 쌀을 한 줌 움켜보라. 어떻게 되는지를 경험하라. 조금씩 빠져나간다. 그래서 더 많이 움켜쥐려고 한다. 더 많이 움켜쥐려고 할수록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분식 가게에서 단무지 코너를 보게 되면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세요’라고 써져 있다. ‘필요한 만큼 가져가세요’도 아닌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세요’ 일까를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왜 ‘~만큼만’일까? 음식쓰레기 문제일까? 강조를 의미했을까? ‘필요한 만큼만 제발요!’ 이런 의미로 이해하면서 우리 삶도 그것과 같다. 매순간 소유와 존재를 생각하게 했다. 존재하기 위해서 최소의 것을 취하게 된다. '살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살고 있는 듯 하다.

우리는 어느 날부터 필요이상의 것을 저축한다. 미래의 불안과 타인과의 경쟁에 있어서도 그렇다. 또한 ‘필요한 만큼만’을 일 했을 때는 더 이상 하지 않으려고 한다. 때론 자기개발, 자기만족을 하기 위해서 필요이상의 것을 원하며 목표성취를 위해 노력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이기심이 생긴다. 그 이기심으로 인해 욕심이 생기고, 욕심으로 인해 불균등이 생기면서 보이지 않는 경쟁의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 어쩌면 우리는 다시 ‘필요한 만큼만’을 소유했던 시절로 가야하는지도 모른다. 채워지면 비워야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있는데 채우기만 하면 비우는 방법을 모른다.

채우기만 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즉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법을 터득하기 힘들다. 또한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눔을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타인에게 보여 지기 위한 나눔은 다른 형태다. 일상생활 속에서도 채움과 비움은 무한히 반복된다. 김장철에 그 해 김장 김치를 김장통에 넣기 위해서는 그 전에 했던 김장 김치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 또한 계절에 맞는 옷을 꺼내 입기 위해서는 제 때에 옷을 정리해야 한다. 새 옷을 샀을 때는 입지 않는 옷을 정리해야 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예전에는 마음 속으로만 ‘잘 보여야지. 밉보이면 득(得) 되는 게 하나도 없어’라고 생각했다면, 지금의 사람들은 처음부터 들어낸다. 다른 사람한테 잘 보여서 실(失)이 되는 것은 없지 않느냐라는 말도 한다. 그것은 과시욕이다. 과시욕은 비교의식을 생산해 낸다. 비교의식은 결국 불행의 출입문이 된다.

‘아프리카의 한 마을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화학비료를 사용해 보았다. 이 비료를 사용한 땅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곡식을 수확했다. 감탄한 농부들이 마을의 한 어르신께 가서는 "어르신, 백인들이 주고 간 이 가루를 썼더니, 수확량이 두 배나 늘어났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어르신은 "잘되었네, 친구들. 내년에는 농사를 반만 지어도 될 테니 말일세."라고 대답했다.’ 과연 그들은 내년 농사를 반만 지었을까?

'필요한 만큼'의 의미는 각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다. 그러나 최소를 의미한다. 최소의 소유를 만족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필요한 만큼’의 추상적인 의미를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이것은 필자에게도 어려운 단어다. 그래서 어쩌면 아둥바둥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보면 자칫 도덕성, 양심, 인간애 등을 놓치게 된다. 비움이 없는 채움은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의미한다. 그것은 욕심일 뿐 즐겁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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