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재민의 정치레이더 92] “기대해도 좋다”에 담긴 정치적 해석

지난 10일 충남도청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환영 나온 충남도민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 제공
지난 10일 충남도청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환영 나온 충남도민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 제공

‘충청도식 화법’이라고 있습니다.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면 직설적이 아닌, 에둘러 말하는 표현 방식입니다. 가령 누군가 무엇을 부탁했을 때 “알았다”고 하는 경우입니다. 대개 “알았다”고 하면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충청도식 화법은 ‘생각해 보겠다’거나 ‘부탁이 뭔지 알겠다’고 하는 중의적 의미로도 쓰이기 때문에 ‘오케이’로만 받아들였다간 간혹 낭패를 보기도 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어제(10일) 11번째 전국 경제투어로 충남을 찾았는데요. 충남도민들은 문 대통령이 가져온 보따리에 지역 최대 현안인 ‘혁신도시 지정’이란 선물이 들었을까 몹시 궁금했을 겁니다.

문 대통령은 비공개로 진행된 지역 기업인들과 오찬에서 혁신도시 지정 건의에 “기대해도 좋다”고 했습니다. 정말 기대할 만한 답변이었을까요? 문장 그대로만 해석하면 긍정적입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이 “기대해도 좋다”고 한 말에 앞서 한 말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법령 개정이 필요하지만, 여당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여당이 노력을 하고 있으니 기다리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것처럼 들립니다. 또 말 속에는 ‘여당’은 있어도, ‘정부’는 없습니다.

확대해석하면 ‘여당이 많이 노력하고 있으니 기대해도 좋다, 다만 정부는 모르겠다’고도 들립니다. 비공식 자리였기에 대통령이 한 말이 어떤 뉘앙스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참석자들이 박수를 쳤다고 하니 긍정적인 어조였을 걸로 짐작할 따름입니다. 함께 자리한 양승조 지사도 출입기자 간담회에서 “그 정도 말씀이면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고 했습니다.

“그 정도 말씀”이라는 표현도 알쏭달쏭하지만 굳이 해석은 않겠습니다. 그래도 일견 걱정은 됩니다. 문 대통령의 “그 정도 말씀”이 혁신도시란 ‘선물’이 아닌, ‘희망고문’이면 어쩌나 하는.

충남 혁신도시 지정은 지난 대선 당시 ‘내포신도시 환황해권 중심도시 육성’으로 공약에 들어갔습니다. 이후 지역에서는 대전과 함께 ‘공약 이행’ 요구가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내년 총선을 앞둔 지금이 적기라며 속도전에 나섰습니다.

그런데요. 이낙연 총리는 올해 1월 홍성 광천시장을 찾아 “혁신도시를 늘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부정적 견해를 내놓았습니다. 6개월 뒤인 지난 7월 대정부 질문에서는 “세종시도 충청권이라는 의견이 있다”거나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즉답을 피했습니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어떻습니까. 지난 2일 국정감사에서 2차 공공기관 이전계획 수립 의지를 묻는 강훈식 민주당 의원 질의에 “사회적 합의와 절차가 필요하다”고 원론적 대답만 했습니다.

김 장관은 “혁신도시에 대한 성과 평가가 내년 3월 끝나 용역결과를 보고, 공론화 과정을 거친 후 결정하겠다”고도 했는데요. 정부 고위 인사인 국무총리와 주무부처 장관이 혁신도시 지정에 두루뭉술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겁니다.

문 대통령이 언급한, 혁신도시 지정에 많이 노력하고 있다는 여당, 즉 더불어민주당은 아직까지 당론 채택을 하지 않은 채 미적거리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문 대통령이 충남도민 염원인 혁신도시 지정을 공개석상도 아닌, 밥자리에서 “기대해도 좋다”고 한 말은, 충청도식 화법을 떠나, 온전히 ‘오케이’라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그럼에도 다음 주(15일) 충남도 국정감사에서 ‘혁신도시 지정에 많이 노력하고 있는’ 민주당은 문 대통령의 발언을 낙관적으로 해석할 겁니다. 반면 한국당은 도민을 우롱했다며 옥신각신 하는 모습이 ‘안 봐도 비디오’입니다.

양 당이 아전인수식 해석으로 티격태격하는 동안 총선은 다가오고, 대선 공약은 어쩌면 총선 공약으로 둔갑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문 대통령은 충남의 ‘해양 신산업’에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는데요. 대선 공약도 못 지키는 상황에서 ‘신산업’이라니. 그저 먼 이야기로 들립니다.

정치의 기본은 ‘신뢰’에서 출발합니다. 문 대통령이 충남 방문에서 꺼내다 만 보따리 안에 과연 ‘혁신도시’는 있었을까요? 잔치는 끝났습니다. 다시 속도전에 나설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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