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레 동안 이스탄불 여행을 마친 뒤 터키의 수도 앙카라로 향했다. 앙카라는 오스만제국이 1차대전에서 패하여 해체되자 독립전쟁을 벌였던 아타튀르크가 1923년 터키공화국을 수립한 뒤 천도한 도시로서 인구 550만 명으로 이스탄불에 이은 터키 제2의 도시이다.

앙카라에서 맨 먼저 찾아간 곳은 터키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 1831~1938)가 묻혀 있는 아타튀르크 능묘(Ataturk Memorial Park)인데, 그는 1차 대전 때 오스만제국의 장군으로서 연합군과 싸워서 승리한 전쟁영웅이자 오스만제국의 패배 이후에는 터키의 독립전쟁을 주도한 건국의 아버지이다.

터키어로 케말은 ‘성숙’하다는 뜻을, ‘무스타파’는 완벽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1934년 터키 국회는 그에게 ‘아타튀르크’란 경칭을 수여했는데, ‘아타’는 아버지, ‘튀르크’는 터키를 의미하니, ‘완벽한 터키인의 아버지’라는 최고의 찬사이다.

그의 사후 9년에 걸쳐 1953년에 조성된 능묘를 아네트 카비르(Anitkabir)라고 하는데, 2002년 능묘는 거대한 성역으로 확장했다. 터키인들은 ‘반드시’라고 할 만큼 아타튀르크 영묘를 참배해야 한다고 한다.

 앙카라 시내에서 지하철 아마돌로 역에서 내린 뒤 10분 정도 걸어가면 아타튀르크의 능묘가 있는데, 능묘는 연중무휴 개장하고 입장료도 무료이다. 정문에서 약 5분 정도 걸어가는 완만한 언덕길은 포장되어 있지만, 정문에서 능묘 입구까지 무료 셔틀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앙카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능묘 언덕을 ‘전망의 언덕’이라고도 하는데, 이곳에는 국기게양대를 사이로 두 개의 건물이 있다. 외관은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과 비슷하지만, 돌기둥이 조금은 투박하다.

베트남을 통일한 하노이의 호찌민 기념관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능묘는 전국 각지에서 생산된 석재들을 건축자재로 사용함으로써 터키인들의 국민통합과 아타튀르크에 대한 정성을 표시했다고 한다.

3-1. 아타투르크
아타투르크
1. 능묘
능묘
1-1. 국기게양대
국기게양대
1-3. 하노이 호치민 기념관
하노이 호치민 기념관
2. 능묘 경비병
능묘 경비병

 능묘 양편에는 각각 세 명의 입상이 있는데, 왼편은 남성학자, 남자군인, 농부이고 오른쪽은 여성학자, 여군, 농부의 아내라고 한다. 이것은 오랫동안 이슬람교를 믿어온 터키인들이 남녀차별 폐지와 국민통합으로 국가를 건설하자는 의미라고 한다.

능묘 입구 양쪽에는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데, 병사들이 서 있는 건물 벽에는 아타튀르크의 연설문에서 발췌한 ‘공화국 선포문’이 터키어로 새겨 있다. 아타튀르크의 무덤은 지하에 있으며, 무덤 옆에는 그의 모습이 거대한 크기로 걸려있다.

또, 국기게양대 아래는 아타튀르크가 생전에 사용하던 유품과 업적, 일생에 관련된 자료를 전시해 둔 박물관이 있다.

 행랑을 따라 아타튀르크의 능묘 반대쪽으로 가면, 아타튀르크의 오랜 전우이자 그 뒤를 이어 터키의 두 번째 대통령이 되었던 이즈메트 이노뉘(İsmet İnönü: 1884~1973)의 무덤도 있다.

 1881년 오스만제국이 통지하던 그리스의 살로니카 부근에서 가난한 세무 관리의 아들로 태어난 아타튀르크의 어렸을 적 이름은 ‘무스타파’라고 했는데, 그는 군인이 되려고 마케도니아의 군사예비학교에 들어갔다.

그때 담임교사가 수학 실력이 탁월한 그에게 감탄하여 ‘완벽하다’라는 뜻의 ‘케말(Kemal)’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고 하는데, 아타튀르크도 이 별명이 마음에 들어 ‘무스타파 케말’이라고 했다고 한다.

1-2. 행랑
행랑
2-1. 동상
동상

 군사예비학교 졸업 후 1899년 수도 이스탄불에 있는 오스만 군사대학에 들어갔고, 1905년에는 다시 참모대학에 들어갔다. 참모대학 졸업 후 현재의 시리아 수도인 다마스쿠스에 주둔하고 있던 오스만제국의 기병대 장교로 배속되었는데, 그는 이곳에서 오스만제국의 술탄 제도에 반대하는 장교들의 비밀모임에 가입했다.

그는 1907년 술탄제 폐지와 터키 민족의 독립,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비밀조직인 청년투르크당(Young Turks)에 가입하면서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는데, 청년튀르크당은 1908년 통일진보위원회(CPU)라는 정당이 되어 혁명을 주도하여 6월 24일 헌법을 부활시키고 의회제 도입에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아타튀르크의 능력이 크게 인정받았다.

3. 무덤
무덤

 1차 세계대전 때 오스만제국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편에 서서 영국·프랑스·러시아의 삼국동맹(三國同盟)과 싸웠으나 패배하여 시리아, 아라비아, 아르메니아 등 많은 영토를 잃었다.  

그러나 당시 사단장이던 아타튀르크는 이스탄불의 서쪽 해안인 갈리폴리반도 전투에서 불과 14000명의 군사로 영불연합군 20만 명을 물리침으로써 일약 국민적인 영웅이 되어 ‘파샤(지휘자)’라는 칭호를 얻었는데, 이때부터 그는 ‘무스타파 케말’이라는 이름보다는 ‘케말 파샤’로 더 많이 불렸다.

1916년 코카서스 전선에서 남하하는 러시아의 대군을 성공적으로 격파했지만, 술탄 정부의 무능함에 실망하여 사령관직을 사임하고 이스탄불로 돌아갔다. 1918년 7월 메흐메트 6세의 요청으로 다시 팔레스타인 지역을 방어하는 사령관직을 맡았지만, 전쟁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아타튀르크 동상
아타튀르크 동상
9-1. 시내 동상
시내 동상

 수도 이스탄불에 연합군이 진주하고, 1919년 5월에는 그리스가 터키 제2의 도시 이즈미르까지 점거되자, 국민들 사이에는 국가존립에 대한 위기감과 함께 민족주의 정신이 커져서 아타튀르크는 1차 세계대전 이전 오스만제국이 점령했던 영토는 포기하더라도 터키 고유 영토만은 지켜야 한다는 신념 아래 세력을 모으고, 오스만 술탄 정부와 그리스 침략군에 저항하는 본부로 삼았다.

1920년 4월 소집된 ‘대국민회의(Grand National Assembly, GNA)’에서 그는 회장이 되었는데, 대국민회의는 터키 민주공화국의 임시정부와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1922년 5월 그는 오스만제국을 무너뜨리고, 이듬해 7월 연합국으로부터 터키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받으면서 로잔 조약을 체결하여 현재의 터키 국경선을 확정했다. 그해 10월 앙카라를 수도로 삼고 터키 민주공화국 대통령에 취임하여 본격적인 개혁정책을 단행했다.  

그가 이스탄불에서 앙카라로 천도한 것은 632년 이래 1300년 동안 이어져 이슬람과의 단절을 위한 조치였으며, 술탄-칼리프제 폐지,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새로운 사회 건설을 추진했다.  

그 결과 이슬람 국교 폐지, 일부다처제 폐지, 남녀평등 교육, 여성 참정권을 실행했다. 달력도 태양력으로 바뀌고, 1928년에는 터키어의 아랍 문자 표기법을 폐기하고 로마자 표기법으로 대체했다.

그의 개혁정책은 이슬람 강경파의 거센 반발도 있었지만, 강력한 국민적 지지를 받으며 15년 이상 집권하다가 1938년 이스탄불의 돌마바흐체 궁에서 57세로 죽었다(아타튀르크에 관하여는 2019. 8. 19. 이스탄불 돌마바흐체 궁 참조).

9-2. 터키 화폐
터키 화폐

터키에서는 매년 11월 10일 오전 9시 5분, 그가 죽은 시간에 맞춰서 전국적으로 사이렌이 울리는데, 모든 차와 사람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그를 기리는 묵념을 한다.

오늘날의 터키를 있게 만든 그의 초상화는 관공서, 학교뿐만 아니라 동네의 조그만 구멍가게에도 걸려있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공원이나 큰 거리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또, 터키 지폐의 앞면에는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36년과 해방, 그리고 6.25. 동족상잔을 겪으면서 오늘에 이른 우리에게는 그만큼 국민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 하나도 없다는 현실에 아쉬움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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