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괄의 신비한 산야초]

대전시 중구청 평생학습센터 강사.
대전시 중구청 평생학습센터 강사.

첩첩산중에 나무들만 무성하고 빼꼼히 보이는 하늘로 흰구름이 쏜살같다. 굽이굽이 능선을 따라 깊게 이어진 계곡은 물소리만 들리지 흐르는 물은 종적도 없다. 한참을 올라 쉼터에서 냇가를 내려다보니 저 아래에 물보라가 보인다. 그 깔막진 비탈에 오래된 적송이 중심을 잡고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다. 시원한 바람이 더운 가슴을 쓸어준다. 휴가차 십 년 만에 찾은 불영(彿影)계곡은 여전하다. 산도 나무도 그대로인데 나만 구름처럼 흐르다 돌아온 것 같은 감회가 인다. 

영월로 가는 길은 내리계곡을 따라 꼬불꼬불하고 오르내림을 반복한다. 이 산을 넘으면 되겠다 싶으면 더 큰 산이 나오니 갈수록 태산이란 말이 절로 나온다. 고갯마루를 올라 아래를 내려 보니 까마득하다. 계곡을 겨우 빠져나가니 김삿갓면 이정표가 보인다. 역사의 인물을 지역의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니 재미있다. 

김삿갓의 문학관과 유적지를 보고자 찾는 길도 굽이굽이 먼 계곡이다. 구불구불 이 길을 그 옛날에 어찌 찾아 들었을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곳곳을 헤매다 이곳으로 흘러들었을 이백 년 전의 김삿갓 모습이 그려진다. 조상에 대한 자책감으로 평생 삿갓을 쓰고 살았다는 방랑시인 김삿갓. 처음 찾는 곳이지만 왠지 익숙한 느낌이다. 넓은 묫자리도 인상적이다. 잘 다듬어 관리된 잔디가 깔끔해 보인다. 그 봉분의 용머리 앞으로 무릇꽃이 듬성듬성 피어 눈길을 끈다. 뽀족하게 솟은 꽃자루 위에 연한 보랏빛의 꽃들이 매달려 하늘거린다. 푸른 잔디를 배경으로 꽃색깔이 대조되어 눈에 금새 들어온다.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저승에서 이루고 있음을 보라색으로 전해주고픈 시인의 마음은 아닐까. 깊은 산 중, 산소 옆에 저절로 핀 무릇꽃은 김시인(詩人)의 분신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릇은 들에 흔히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백합과 식물이다. 키는 무릎 정도로 자라고 잎은 유선형으로 봄과 가을에 두 차례 두 개씩 나오며 끝은 뾰족하고 털이 없다. 봄에 나온 잎은 여름에 말라버리고, 선형잎은 보통 2개가 마주 나온다. 꽃은 7∼9월경에 길게 올라온 꽃대 위에 자색으로 이삭처럼 모여 피는데, 아래쪽에서 부터 위쪽으로 피어 올라간다. 뿌리는 달걀형의 비늘줄기로 외피는 흑갈색이며, 비늘모양의 뿌리 아래로 수염뿌리가 달린다. 봄철에 어린 싹과 뿌리를 캐어 나물로 식용한다. 다른 이름으로 물굿, 물구지라고도 부른다. 이름이 비슷한 수선화과의 꽃무릇과는 다른 풀이다. 

「한국본초도감」에 의하면 비늘줄기와 지상부를 면조아(綿棗兒)라는 생약 이름으로 약용하는데, 심혈관 계통에 강심효과를 나타내는 약리작용이 있다. 유방염이나 피부가 헐어 생긴 부스럼에 짓찧어 환부에 붙이면 효과가 있다. 지상부를 달인 물은 치통, 근육과 골격의 동통, 타박상을 낫게 한다. 

무릇꽃.
무릇꽃.

어린시절 가물가물한 기억이 있다. 아마도 보릿고개였지 싶다. 아랫집 만식이 엄마가 배가 고파 칭얼거리는 나를 데려다 시커먼 가마솥의 멀건 풀죽을 퍼 주었다. 그때 먹은 사기그릇 속의 달짝지근한 죽 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훗날 어머님 생전에 여쭸더니 무릇죽이었다. 어머니는 무릇나물은 사람을 살리는 먹거리라고 하셨다. 이렇게 무릇은 봄철에 양식이 바닥나고 먹고 살기 힘든 때에 곡식대신 먹었던 구황식물이었다. 

첩첩산골 바위에 새긴 시 내용들을 보니 뜬구름 같이 살던 김삿갓의 혼을 만난듯하다. 이렇게 척박한 곳에서 오로지 생존이 문제였던 시인의 고뇌는 무엇이었을까. 나뭇가지로 이어 만든 흙집의 초라한 생가터를 보며 시인의 한(恨)을 생각해 본다. 

마음따라 훌훌 떠난 여행길에 접어든 강원도 산골. 우연한 기회에 우연히 만난 옛 시인의 무덤가에서 본 풀꽃 한포기가 눈가에 어린다. 바위에 새긴 김 시인의 회한이 담긴 시 한수를 읊조려 본다. 

[푸른 하늘 웃으며 쳐다보니 마음은 편안하건만, 세상길 돌이켜 생각하면 다시금 아득해지네. 가난하게 산다고 집사람에게 핀잔 받고, 제멋대로 술 마신다고 시중 여인들에게 놀림 받네. 세상만사를 흩어지는 꽃같이 여기고, 일생을 밝은 달과 벗하여 살자고 했지. 내게 주어진 팔자가 이것뿐이니, 청운이 분수밖에 있음을 차츰 깨닫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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