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창호의 허튼소리] 전 충남도 부여부군수, 수필가

나창호 전 충남도 부여부군수.
나창호 전 충남도 부여부군수.

비록 많은 양이 내리지는 않았지만 오락가락하던 장마 비가 그치고 나니 햇볕이 연일 뜨겁고 후텁지근하다. 하늘에는 흰 뭉게구름이 수없이 떠있고 구름사이로 여름 같지 않은 푸른 하늘이 싱그럽다. 비 그치고 날씨가 한껏 무더워지니 매미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는지 아침나절부터 여기저기서 여러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매미울음소리 시끄러운 이제부터가 진짜 여름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핸드폰에서도 연일 폭염경보가 뜬다. 야외활동을 자제하고, 충분한 물마시기를 하라는 주의를 준다. 나도 이제 무더위에 주의를 할 나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매일 집안에서 선풍기나 끼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딱히 할 일이 없을 때에야 별 수 없이 집을 지켜야하지만, 볼 일이 있는데도 덥다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오늘은 모처럼 집에 있을까 하다가 한낮 더위를 피해 오후 세 시쯤에 집을 나섰다. 그동안 방치했던 가지 않는 손목시계에 수은전지를 갈아 낄 겸 K은행의 카드 포인트가 곧 소멸한다는 문자 메시지를 받은 지 한참이나 됐는데도 아직 어떻게 할지를 몰라 은행에 찾아가볼 심산이었다. 포인트를 쓸 수 있는 카드회사 가맹점을 알 수도 없었고, 캐시백으로 돌려받는 방법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동안 카드회사에 ARS 전화를 몇 차례 해봤지만, 늘 통화 중이라서 연결이 안 됐던 것이다. 

한편으로 얼마 되지 않는 돈인데 ‘그냥 포기하고 말까?’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할 일 없이 노는 처지에 한번 알아보는 것도 몸을 움직일 겸 겸사겸사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전역 부근의 중앙시장 정류장에서 버스를 내리니 더운 기운이 훅 끼쳤다. 냉방이 잘된 버스에서 내렸기 때문에 더한 것 같았다. 은행 문을 닫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서 먼저 은행에 들리기로 하고 원동에 있는 은행으로 가는데 더위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가급적 건물 그늘 속으로 걸어야 했다. 이런 무더위에 그늘마저 없다면 얼마나 고역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은행 안은 무척 시원했다. 에어컨을 빵빵 틀고 있었다. 번호표를 뽑아들고 한참을 기다렸지만 곧 은행을 찾은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창구에 가서 신분증과 핸드폰 문자를 보여주며 “카드 포인트가 소멸된대서 왔는데 포인트 쓰는 방법을 알려주거나 현금으로 돌려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창구 아가씨가 어딘가에 전화를 하며 이것저것 알아보더니 포인트 금액이 11만 2000원이라면서 계좌에 입금시켜 준다고 한다. 아하! 소멸대상 포인트가 1만원 조금 넘는 소액이라서 포기할까 했는데 은행에 오기를 잘했다. 카드 사에서 얄팍하게 전체 포인트를 알려주지 않고 채권시효 5년이 임박한 금액만 통지해주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 포인트 얼마 중에 이달 말까지 얼마가 소멸됩니다.’하고 알려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지난달에도 비록 소액이지만 쓰지 못하고 날린 일이 있었다.

만약 오늘 은행을 찾지 않았다면 시효가 다 된 포인트를 야금야금 날리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불편했지만, 한편으로 생각지 않은 돈을 한꺼번에 찾아서 기분이 좋았다. 친절히 일을 처리해준 창구 아가씨가 그렇게 예뻐 보일 수 없었다. 볼일을 마치고 은행을 나오려는데 정문이 닫혀 있어서 후문으로 나와야 했다. 벌써 시간이 한참 지났던 것이다.

시계 전지를 갈아 끼려면 시계점이 많은 역전 통 도로까지 나와야 했다. 나는 아예 중앙시장 내로 들어가서 시장 속 그늘 길을 걸었다. 시장은 한가했다. 경기가 나쁨을 알 수 있었다. 나라경제가 어려워 큰일이라는 무거운 생각이 자꾸 들었다. 경제가 활기차면 시장은 왁자지껄 떠들썩하고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넘쳐 날 텐데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돈벌이가 안 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시장 속 길을 걸어 나와 도로를 건너고, 다시 시장 속 길을 걸어 역전 통으로 나왔다. 시계 점에 들러 3000원을 주고 콩알만 한 전지를 갈아 꼈다. 멈춰 있던 시계바늘이 다시 돌기 시작한다. 멈춘 듯 활기를 잃은 우리나라 경제도 시계바늘처럼 다시 돌았으면 좋겠다.

해가 제법 설핏한 것 같아서 대전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갈마역에서 내렸다. 운동 삼아 집까지 걸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직 더위가 수그러든 게 아니었다. 그늘을 골라가며 집에 돌아오니 온몸에 땀이 흠뻑 뱄다. 나는 땀으로 미끄러운 몸을 씻으면서 슬며시 웃음이 났다. 

덥다고 그냥 집에만 앉아 있었으면 소액 포인트를 포기하기 십상이었을 텐데, 몸을 움직인 탓에 예상치도 못한 돈을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역시 돈은 요물인 모양이다. 많던 적던 손에 들어오면 기분이 좋고, 손에서 나가면 서운한 게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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