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이스탄불 소피아 성당
[126] 이스탄불 소피아 성당
  • 정승열
  • 승인 2019.08.05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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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열 법무사
정승열 법무사

 2000년 동안 로마, 비잔틴, 오스만 튀르크 등 세계를 지배했던 3대 제국의 수도였던 터키의 이스탄불(Istanbul)은 오랜 역사만큼 다양한 기독교문화와 이슬람문화가 공존하고 있다.    

세계문명의 발상지인 그리스에서는 일찍부터 이곳을 소아시아(Asia Minor)라고 불렀는데, 소아시아란 ‘태양이 솟아오르는 곳’이라는 동쪽 지방을 의미한다. 이곳에는 BC 1950년 세계 최초로 철기를 사용했던 히타이트 족이 살았으며, 또 동서양 세력의 교차지역이어서 수많은 국가가 출현했다가 사라졌다(소아시아는 2019. 7.22. 터키여행 참조).

BC 671년 오리엔트를 처음 통일한 나라는 아시리아였으나, 아시리아는 통일을 이룬 지 30년 만에 메디아와 신바빌로니아 연합군에게 멸망하였다.

그리고 BC 546년경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가 이 지방을 점령하여 4개의 총독 관구(總督管區)로 나누어 다스리면서 동서양 세력이 마주치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BC 492~ BC 480)이 벌어졌다. BC 331년 마침내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BC 356~ BC 353) 대왕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를 물리치고 아나톨리아를 점령했다. 알렉산더 대왕은 아나톨리아 지방은 물론 인도 북부 박트리아까지 점령했으나, 33세의 젊은 나이로 후계자 없이 죽자 마케도니아는 분열되었다. 

BC 190년경 로마가 소아시아 지방을 점령한 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대군관구(大軍管區)들을 해체하고 속주들을 여러 행정관구로 묶었는데, BC 1세기경 베스파시아누스 황제(Vespasianus: 재위 69~79)는 이 지방을 직접 통치하면서 아나톨리아(Anatolia)라고 불렀다. 이 무렵 소아시아 지방에는 에베소, 페르가몬, 서머나 등 7개의 그리스도교교회가 세워졌다. 

1. 이스탄불 성소피아성당

1-1. 소피아성당 전경
1-1. 소피아성당 전경

2. 성당 입구
2. 성당 입구

2-1. 황제좌석과 기도실
2-1. 황제좌석과 기도실

2-2. 성당 1층
2-2. 성당 1층

2-3. 성당 천정중앙
2-3. 성당 천정중앙

313년 기독교를 공인했던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us: 재위 306~337)는 324년 동로마 황제가 되어 이스탄불을 동로마의 수도로 삼고 '신 로마'(New Rome)라고 불렀는데,  이스탄불은 BC 667년 그리스인들이 식민도시 비잔티움(Byzantium)을 세운 곳이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25년 신 로마에 소피아 성당(Hagia Sophia)을 건축하더니, 330년에는 ‘신 로마’를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고 고쳤다. 그리고 395년 로마 제국이 동서로 양분될 때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는 동로마 제국은 토착민의 언어와 종교들이 사라지고 철저하게 그리스화(Greece化) 되었다.

동로마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Justinanus Ⅰ: 482~565)는 로마의 아치(Arch) 기술과 동방의 돔(Dome) 기술을 조합하여 5년에 걸친 대대적인 공사(532~537) 끝에 현재의 소피아 성당을 증축했는데, 이전의 구성당(舊堂)을 ‘성스러운 예지(叡智)’(하기아 소피아)라고 한다. 소피아 성당은 지름 33m, 높이 56m의 돔(Dome)으로 지었는데, 성당 높이 56m는 아파트 20층 높이에 상당하므로 현대 건축물과 비교한다 해도 얼마나 큰 성당인지 짐작할 수 있다. 

성당은 중앙 돔의 무게를 분산하기 위하여 주변에 작은 돔을 만든 균형 감각과 예술미의 극치를 이룬 건축양식으로서 ‘비잔틴 양식’이라 하여 훗날 이슬람 건축양식의 기초가 되었으며, 1626년 바티칸의 베드로성당이 건축되기 전까지 1000년 이상 세계 최대의 성당이었다.

소피아 성당의 헌당식에 참석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너무 감격하여 “오! 솔로몬이여! 나, 그대에게 이겼노라!”고 부르짖었다고 하는데, 서유럽 대부분의 성당이 그러하듯이 예배 이외에 여러 황제의 묘소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095년부터 1291년까지 약200년에 걸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십자군전쟁’ 동안 콘스탄티노플은 일시적으로 로마 제국이 회복하기도 했으나, 1261년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 이후 1차 세계대전 때까지 오스만 튀르크의 세계였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이스탄불로 개칭했다.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초대형 공간에 돔과 아치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지진에도 끄떡없는 소피아 성당보다 우수한 모스크를 지으려고 했으나, 소피아성당 건축의 비밀을 풀지 못하자 소피아 성당을 파괴하지 않고 성당 네 귀퉁이에 첨탑 미나레트를 세우고 성당의 내벽은 백회로 기독교 성화들을 지운 뒤 그 위에 이슬람교 코란의 금문자와 문양들로 채워서 이슬람 사원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오늘날 힘차게 분수를 뿜어내는 광장을 중심으로 왼편에 소피아 성당, 오른쪽에는 블루 모스크(Blue Mosque)라고 하는 이슬람 사원을 지었다.

이처럼 소피아 성당은 아름다움과 정교함으로 파괴되지 않고 이슬람 사원으로 고쳐서 사용된 독특한 역사를 갖고 있는데, 1차 대전 후 오스만 튀르크제국이 해체되고 1923년 터키민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인 1935년 소피아 성당은 박물관으로 일반에 공개되었다. 또,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에서 세계 최고의 걸작 건축물 1위로 선정하기도 했다. 
 

3. 2층 황제의 길 천정 벽화
3. 2층 황제의 길 천정 벽화

4. 2층에서 본 성당
4. 2층에서 본 성당

공교롭게도 우리가족이 찾아간 월요일이 정기휴관이어서 우리는 다른 유적지를 관람하고 다시 갔는데, 입장료는 40터키리라(한화 약8000원)이다. 영어, 독일어, 일본어와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가 있다. 성당 본관에는 모두 7개의 출입문이 있는데, 그중 가장 크고 높은 가운데 출입문이 황제와 대주교만 출입할 수 있는 문이다. 출입문은 노아의 방주처럼 참나무로 만들고, 문틀은 청동으로 만들었다.

성당 안에 들어서면 넓은 통층이어서 훨씬 더 크고 넓어 보이는데, 홀은 동서 77m, 남북 71.7m로서 약간 직사각형이다. 홀 오른편의 작은 방 같은 공간이 황제가 앉는 좌석이며, 기도할 때에만 그 앞의 둥근 모자이크가 있는 곳에 나와서 엎드려 경배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황제가 1층 본당으로 입장하는 것은 자신의 대관식 날 한번 뿐이고, 나머지 예배 때는 다른 길을 통해서 2층으로 올라가 1층의 신하나 신자들과 달리 예배를 보았다고 한다. 현재 1층 홀 왼쪽 절반가량은 복원 공사 중이어서 분위기는 다소 산만하다.

황제가 2층으로 올라가는 길을 ‘황제의 길’이라고 하는데, 이곳은 계단이 아니라 나선형으로 편편한 돌을 깔아 놓았다. 마치 백화점의 지상주차장으로 올라가는 차로와 비슷한데, 이것은 황제가 탄 가마가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2층으로 올라가면, 길이 81m, 넓이 70m에 이르는 광대한 3개의 회랑으로 통하며, 지름 33m의 거대한 천정 둥근 돔을 교묘하게 접합시킨 바실리카 양식의 소피아 성당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2층 중앙 정면에는 성모 마리아 상이 보인다. 특히 성당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가운데 벽면의 두꺼운 회칠을 벗기면서 성모 마리아를 비롯한 비잔틴 시대의 화려한 흔적들이 드러난 것을 알 수 있다.

또, 천정 중앙에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상이 있고, 돔 천장에 이슬람 사원이었던 탓에 경전 《꾸란》 구절이 ‘하트’라는 이슬람 서체로 아름답게 쓰여 있다.

이처럼 기독교문화와 이슬람문화가 함께 있는 소피아성당은 중세  동서양의 예술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소중한 장소이다.

4-1. 이슬람 경구
4-1. 이슬람 경구

4-2. 백회를 제거한 후 나타난 예수와 성모마리아, 세례 요한
4-2. 백회를 제거한 후 나타난 예수와 성모마리아, 세례 요한

5.갤러리 안내문
5.갤러리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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