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용 칼럼]

우리에겐 두 가지 일본이 있다. ‘가해자 일본’과 ‘필수적 일본’이다. 가해자 일본은 ‘반드시 이겨야 할 일본’이나, 필수적 일본은 ‘아직은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갖가지 반일운동은 ‘가해자 일본론’이 근원처라 할 수 있고, 경제전쟁이 벌어지자 제3자인 미국에 달려가는 현실은 ‘이길 수 없는 일본’을 확인해준다. ‘반드시 이겨야 하지만 아직은 이길 수 없는’ 이 모순적 대상, 일본을 어찌해야 하나? 답은 일본이 아니라 우리 한국 안에 있다고 본다.

우리에겐 두 얼굴... ‘가해자 일본’ ‘필수적 일본’

보통 두 나라 사이는 단선적 관계일 수만은 없고 서로 다양한 관점과 호불호의 감정이 함께 섞여있지만 관계의 모순성이 커지면 파국이 올 수밖에 없다. 그동안 우리는 일본에 대해 모순된 두 가지 입장을 가져왔으나 크게 문제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본엔 우리의 이중적 입장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부류들이 존재한다. 아베 총리를 비롯한 일본 극우 세력들이 주로 여기에 해당된다. 한일 경제전쟁은 이들에 의해 기획, 주도되고 있다.
 
파국의 원인은 우리에게도 있다. ‘가해자 일본’에만 너무 매몰돼 ‘필요한 일본’을 망각했거나 경시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 가해자 일본에 대해 책임을 묻고자 하는 분위기가 더욱 팽배해졌다. 이전엔 시민단체나 학계 정도에서 강조돼 온 ‘가해자 일본론’은 사법부와 정부 차원으로 확대됐다. 건국하는 심정으로 했다는 ‘징용공 대법판결’이 처음 나온 건 문재인 정부 이전(2012년)이지만, 정부 차원에서 이를 확인하고 강하게 밀고 나간 건 현 정부에서다.

이 판결이 우리에겐 정의롭고 역사적인 판결이며 나아가 국제적으로도 인정받는 판결이라고 하더라도 일본, 특히 아베 내각은 반발할 게 뻔하고 실제로 그런 반응이 계속 나왔다. 우리 정부는 묵살했다. 내 생각이 100% 맞더라도 상대가 나보다 강하면 협상하고 타협하지 않을 수 없는 게 국제사회다. ‘가해자 일본론’에 빠진 우리 정부는 이를 잊고 있었거나 ‘설마’ 했을 것이다. 설마 일본이 수출규제 카드까지 들고 나올까 하는 안이한 판단이었다면 우리 정부가 아베를 너무 모른 것이다.

아베를 너무 몰랐던 문재인 정부(?)

2002년 9월 일본총리 고이즈미는 일본인 납치문제를 해결하고 북한과의 국교정상화를 위해 평양에 갔다. 아베가 관방 부장관으로 수행했다. 고이즈미는 북한이 건넨 납치자 현황(사망 8명, 생존 5명)을 확인하고 낙담했다. 아베는 고이즈미에게 “북한의 사죄가 없다면 공동선언문에 조인하지 말고 그냥 귀국해야 한다”고 강한 조언을 했다. 다행히도 북측의 사과를 받아내면서 양국의 평양선언문이 조인됐으나 ‘납치’라는 용어가 빠지면서 일본 국내에선 “8명 사망에 납치라는 글자도 없는 선언문에 왜 서명을 했느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러나 조인 과정에서 했던 아베의 강경한 조언이 알려지면서 그의 주가는 크게 올라갔다. 

얼마 뒤 평양선언문의 성과로 납치 일본인 5명이 일본에 일시 귀국했다. 북한은 이들이 1~2주 정도 일본을 방문한 뒤 다시 북으로 돌아오는 조건으로 허락했다. 이들이 일본에 온 뒤, 일본에선 이들을 다시 북으로 보내야 하는지를 놓고 논쟁이 일었다. 일본정부의 애초 입장은 피해자 본인들에게 맡기자는 것이었으나, 아베는 “본인들이 스스로 결정하라는 것은 국가가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국가의 의사로 다섯 명을 북한으로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북한은 반발했으나 아베는 납치 일본인 5명을 귀국시킨 공로를 독차지했다. 자민당은 아베의 인기를 선거에 이용하기 위해 그에게 간사장(당의 넘버2)을 맡겼다. 아베는 그 선거에서 패배하면서 한때 경질되기도 했으나 고이즈미에게 다시 구제되면서 총리에 오를 수 있었다. 아베에겐 ‘대북 강경외교’의 달콤한 열매였다. 아베가 두 번째 총리에 오른 것도 일본 국민들이, 중국(홍콩)의 활동가들이 센카쿠열도에 오성기를 휘날리며 상륙하는 장면을 지켜보며 모욕감을 느낄 때였다.(이상 『아베 신조, 침묵의 가면』 『아베는 누구인가』 참조)

아베는 일본을 다시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고자 한다. 지금의 평화헌법을 개정해야 한다. 국회 3분의 2의 찬성을 얻어야 하고 국민투표를 통과해야 한다. 아직은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베에겐 일본이 주변국과 부딪치고 각을 세워 위기감이 조성되는 게 나쁘지 않다. 아베는 북한이 미사일을 쏘면 좋아한다고 한 일본통 지인은 말했다. 개헌을 위해서라면 없는 빌미라도 만들어 시비를 붙고 싶을 판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정부가 여기에 걸려들었다. 

‘건국 판결’이 단초가 된 외교 참사

‘건국 판결’이 빌미의 단초가 됐다. 일제 때 징용공으로 끌려가 일본기업에서 죽도록 일만 하고 돈을 못 받은 우리 국민이 그 기업에 보상을 요구한 데 대해 대법원이 손을 들어준 판결이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당시 박정희 정부가 받은 무상 3억, 유상 2억 달러는 일본이 식민지배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따라서 ‘배상금’이 아니라 ‘축하금’과 ‘경협자금’ 명목으로 준 돈이었다. 일본으로부터 ‘한일합방의 범죄성’도 인정받지 못한 상태에서 도장을 찍은 청구권협정이었다.

그러면서 정부는 개인이 받아야 할 몫까지 받아냈다. 우리 정부는 “개인 청구권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정부에게 달라”고 했다. 이 때문에 “체약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문구까지 협정문에 넣어야 했다. 우리 정부는 그 돈으로 포항제철도 짓고 고속도로도 냈다. 나중 개인 보상도 일부 했으나 크게 부족한 금액이었다. 그 후 개인 청구권은 소멸된 것으로 여겨왔으나, ‘건국 판결’은 이를 뒤집었다. ‘정부가 개인 청구권을 대신 행사할 수 없다’는 점과 ‘일본이 인정하지 않았던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한 게 판결의 핵심이다. 

그러나 국내에서조차 논란을 피할 수 없었다. ‘건국 판결’에 대해 학계에선 김창록(경북대로스쿨교수) 이홍렬(부천대전임강사·법학박사) 도시환(동북아역사재단센터장·국제법박사) 등의 찬성 입장 논문들이 나왔고, 이근관(서울대로스쿨교수) 박배근(부산대로스쿨교수) 장박진(국민대일본학연구소 전임연구원) 등의 반대 입장 논문들도 나왔다. 민정수석이던 조국은 “2005년 민관공동위원회에서도 한국인 개인이 손해 배상을 청구하는 것은 가능함을 인정한 것”이라며 대법판결을 옹호한 반면, 부산지법 부장판사 김태규는 “대법 판결은 법리 남용으로 법을 무력화시킬 것”이라며 비판하고 있다.

식민지배조차 인정하지 않는 일본이 청구권협정 내용과 어긋나는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수용할 리 없다. 대법 판결은 정부가 외교적 담판을 통해 갈등을 해소하지 않으면 터질 게 뻔한 ‘화약고’였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일본과 신경전만 벌이면서 방치했다. ‘삼권분립’ 등의 이유를 댔지만 납득하기 어려웠다. 대법 판결이 외교문제를 낳는 내용이라면 상대국과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소해야 하는 게 정부 책임이다. 판결이 옳으냐 그르냐와 상관없는 외교 문제다.

국정 운영에서 국가의 명운을 좌우할 수도 있는 외교의 중요성은 강조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이런 중대 외교사안을 현 정부가 왜 방치했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가해자 일본’이나 ‘삼권분립’만으로는 설명이 어렵다. 여당 소속 민주연구원에서 나왔다는 ‘한일갈등 내년 총선에 긍정적’이란 보고서를 이 문제와 연결시키면 이해가 된다. ‘한일갈등’은 잘 활용하면 총선에 호재가 될 수 있다는 뜻 아닌가? 권력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도 하는 게 우리의 저급한 정치 수준이란 사실이 또다시 확인된 것이다.

국제여론, 외교를 경제 보복으로 끌고 간 일본 비판

실수든 고의든 외교 방치는 결국 경제전쟁으로 이어졌다. 외교 문제를 경제 보복으로 대응하는 건 결코 떳떳한 방식이 아니다. 자유무역주의를 해치는 행위다. 이 때문에 일본 스스로도 수출규제 조치를 취할 때 수출품이 북한으로 넘어간다는 등의 억지 이유를 갖다 붙인다. 국제여론도 외교 문제를 경제 문제로 끌고 간 일본을 한결같이 비판하고 있다. 우리에겐 그나마 위안이고 국제여론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당장 일본과 경제적으로 밀접하고 중대한 이해관계가 있는 사이라는 게 문제다.

한 달 전, 일본이 자국 기술 3개에 대해 수출규제 조치를 내리자, 우리 정부와 기업들은 당황했다. 일본 기술 3개에 나라가 흔들리는 모습을 국민들은 지켜봤다. 외교를 방치하면서도 그 결과가 가져올 후과에 대한 대비책은 없었다. 아베가 총리에 오른 과정이나 극우세력의 호위를 받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들이 칼을 갈고 있을 게 분명한 데도 우린 아무 준비가 없었다. 일본은 벌써부터 전쟁 준비를 해 온 게 분명하나 우린 느닷없이 전장(戰場)에 내몰리고 있다.

일본은 끝내 우리를 백색국가에서 제외했다. 1000개 이상의 핵심소재와 부품의 수입이 규제된다는 뜻이다. 징용판결에 대한 불만보다 우리의 미래를 공격하는 데 일본의 본뜻이 있다는 분석도 있다. 그렇다면 더 심각한 문제다. 국민과 기업들은 분노하면서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을 것”이라며 단합을 호소했다. 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가 문제다.

당장은 반일운동을 더 격렬하게 펼치면서 일제 불매운동을 거국적으로 벌이는 방법도 있다. 지방자치단체를 비롯한 일본과의 교류 중단이 더 확대할 수도 있다. 일본행 여행객이 줄면서 일본 관광지가 타격을 받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일본을 이기는 근본적인 방법은 못 된다. 이번 일이 심각한 문제인 건 분명하나 이 때문에 온국민이 분노하고 흥분하는 모습이야말로 - 이것이 일본 언론에 크게 보도되는 것이야말로 - ‘전쟁할 수 있는 나라’를 꿈꾸는 아베와 일본 극우들이 원하는 한국의 표정일 것이다.

분노만으로는 이길 수 없는 일본

무엇보다 분노만으로는 상대를 이길 수 없다. 나라 사이의 문제라면 더욱 그렇다. 정부도 국민도 이번 일에 결연한 자세로 임하되 격분하고 흥분하기보다 의연하고 냉정해야 한다. 국민들의 분노심은 다 방출해내기보다 서로 단합하여 진정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긍정의 힘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남을 이기려면 자신부터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 남을 이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잠깐 이길 수는 있더라도 결국은 지게 돼 있다. 국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 국가의 물질적 정신적 수준과 제도 등이 어느 단계에 이른 뒤에야 남과 겨룰 수 있다.  

우리가 일본을 이기고자 한다면 우리 자신부터 이겨내야 한다. 나라가 위기에 빠졌는 데도 사소한 사케시비나 일삼는 수준 이하의 졸렬한 정치, 도전을 포기하고 죄다 공무원시험 행렬에만 줄을 서는 젊은이들, 정상교육이 불가능할 정도로 무너진 학교교실 등 이겨내야 할 '우리 모습'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이걸 바꾸지 않으면 극일(克日)은 헛구호에 그치고 말 것이다.

일본의 힘은 노벨과학상 22명의 과학기술.. 15세기 기술수준은 일본 0 : 조선 21

일본은 노벨과학상만 22명 배출했다. 미국에 이어 2위다. 노벨상 시즌이면 유력후보 10여 명의 이름이 오르내린다고 한다. 일본은 대학이나 연구소뿐 아니라 중소기업의 직원들 중에서도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는 나라다. 한 공대 교수는 말한다. “그들은 미친 듯이 연구한다. 40년, 50년을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이렇게 해서 나오는 기술 중엔 세계에서 오직 일본만 가진 기술들이 수두룩하다. 우리는 연구원 경력 10년만 되면 펜대를 잡으려 한다.”

일본의 힘은 여기에서 나온다. 국력의 요체를 경제와 국방이라고 할 때 ‘과학기술’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이룩할 수 있는 핵심 요소다. 트럼프와 시진핑의 무역 신경전도 핵심은 첨단기술 싸움이다. 과학기술이 국력인 시대다. 경제전쟁에서 우리가 당혹해 하는 것도 기술 문제다.

노벨상에서 우리는 일본과 비교할 처지가 못되나 일본이 우리보다 100년 먼저 현대과학을 시작한 나라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이토 준타로 교수가 15세기초기부터 중기까지 전세계 국가별 과학적 성과물을 정리한 결과 중국 4건, 일본 0건, 조선 21건이었다.(한국경제)’ 과거 일본에게 학문(논어)과 기술(도자기)을 가르쳐준 나라가 우리고, 가난한 나라에서 유일하게 선진국 대열에 올라선 나라가 우리다. 우리가 못할 이유가 없다.

국민들이 단합해서 급한불부터 끄는 데 백방으로 힘을 쓰되 진정 일본을 넘어서는 길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답은 일본에 앞서 우리 자신에게서 먼저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 0건 조선 21건’의 15세기 과학기술시대가 우리나라 ‘최고의 정치인’ 세종 때라는 점을 우연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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