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창호의 허튼소리] 나창호 전 충남도 부여부군수

나창호 전 충남도 부여부군수.
나창호 전 충남도 부여부군수.

유럽과 아시아가 공존하는 이스탄불은 볼 것이 참 많았지만, 톱카프 궁의 제3정원(박물관)에서 본, 오리 알만한 다이아몬드와 3000년 전의 다윗왕의 칼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다이아몬드는 관광객이 넘지 못하도록 한 밧줄 경계선 안쪽에 별다른 보호 장치 없이 육안으로 볼 수 있게 놓여 있었는데, 하얗게 번쩍이는 빛이 휘황찬란했다. 다윗왕의 칼은 유리진열장 속에 다른 유물과 함께 세워져 있었는데, 밀려드는 관광객들 때문에 그 앞에서 오래 지켜볼 수는 없었지만, 언젠가 봤던 중국 진나라 때의 검처럼 예리한 면은 없고, 단지 누런빛의 칼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다윗이 누구인가? 목동일 때, 이스라엘 왕국을 침범한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을 죽이고, 이스라엘 왕국의 제2대 왕이 된 사람이 아니던가. 16세기 이탈리아의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거대한 다비드상이, 바로 다윗의 상이라 하지 않는가. 이스라엘 왕국의 제3대 왕 솔로몬이 그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는가. 

솔로몬은 다윗이 전쟁에 나간 장수의 아내와 관계해서 얻었다고 전해진다. 솔로몬은 많은 그의 이복형제들과 왕위다툼 끝에 왕위에 올랐다니, 나름 용감하고 현명했을 것이다. 그가 지혜의 왕으로 알려진 것을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한 아이를 두고 서로 친모라고 다투는 두 여인이 있었다. 그녀들은 솔로몬 왕에게 판결을 해달라고 했다. 여인들은 왕 앞에서도 줄기차게 자기가 친모임을 주장했다. 이야기를 듣고 난 솔로몬이, “아이를 둘로 갈라서 반쪽 씩 나눠가져도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한 여인은 좋다고 하는데, 다른 한 여인은 황급히 손을 내 저으며 자기가 친모가 아니라고 자백했다. 솔로몬은 친모가 아니라고 한, 그 여인이 바로 친모라는 판결을 했다. 친모는 자기 아이가 죽는 걸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현명한 판단을 한 것이다.

현명한 판단과 관련한 또 한 이야기를 해본다. 

서양의 시골마을에 삼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신비한 보물을 한 가지씩 가지고 있었다. 맏형은 먼 곳을 볼 수 있는 망원경을, 둘째는 아무리 먼 곳이라도 순식간에 날아갈 수 있는 마술 양탄자를, 막내는 무슨 병이든 고칠 수 있는 마술 사과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 나라 왕의 외동딸이 이름 모를 중병에 걸려 생사를 오락가락하자, 왕이 방(榜)을 내붙였다. ‘누구든지 공주의 병을 고치는 사람을 사위로 삼고, 나라를 물려주겠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맏형이 망원경으로 궁문에 붙은 방문(榜文)을 보게 되었고, 삼형제는 서로 힘을 모아 공주의 병을 고쳐보자고 했다. 그들은 둘째의 양탄자를 타고 순식간에 궁궐에 도착했고, 막내의 마술 사과로 공주의 병을 말끔히 낫게 했다. 삼형제는 왕 앞에서 각기 자기주장을 했다. 맏형은 망원경으로 방문을 보지 못했으면 양탄자나 사과가 있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고 했고, 둘째는 순간 이동하는 양탄자가 없었으면 먼 곳을 어느 세월에 왔겠느냐고 했다. 막내는 자기의 마술 사과가 없었으면 공주의 병을 고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왕은 그 자리에서 주저하지 않고 막내를 사위로 삼는다고 선포했다. 망원경과 양탄자는 아직 그대로 남아있지만, 막내의 사과는 공주가 먹었기 때문에 남아있지 않다고 말했다. 막내만이 공주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주었다고 했다.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은 사람에게 보상을 하는 현명한 판단을 한 것이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다.

며칠 전에 신문을 읽다보니 동맹 선택을 잘못해서 멸망한 고대 도시국가 ‘시라쿠사’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나름대로 첨삭해서 옮겨본다.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에 시라쿠사라는 도시국가가 있었다. 지중해를 접한 아프리카 북부에 있는 강국 카르타고와 이탈리아 반도 중부에 위치한 로마 제국 사이에 끼어있었다. 아르키메데스에게 왕관은 그대로 둔 채 순금으로 만들었는지 여부를 알아내라고 했던 히에론 왕은 현명했다. 그는 50년 가까이 시라쿠사를 통치하면서, 평화 시에는 중립을 지키고, 전쟁 때는 로마의 편을 들었다.

그런데 후계자는 어리석은 십대 중반의 손자 히에로니무스였다. 그에게는 로마와 카르타고의 국력과 전쟁 상황을 판단할만한 능력이 없었다. 그는 ‘전쟁이 끝나면 시칠리아 전체의 소유권을 시라쿠사에게 넘기겠다’는 카르타고의 말에 속아 동맹을 바꾸고 만다. 시칠리아의 절반은 카르타고가 개척한 땅이었던 것이다.

새 동맹국 카르타고의 군대가 도시 안으로 들어오면서 시라쿠사는 분열했고 정치적 혼란 속에서 히에로니무스도 살해된다. 도시의 지배권은 카르타고의 군인들 손에 들어가고 500년 넘게 존속했던 시라쿠사는 로마군의 침공으로 멸망하고 만다. 기원전 212년의 일이다. 약소국이 동맹을 덜컥 바꾼 비참한 결과였다. 히에로니무스가 나라의 명운이 걸린 중차대한 사안을 두고 우매한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구한말의 고종은 현명하지 못했다. 서양에서 들어온 커피를 사발 떼기로 마시면서도 제국주의 열강들이 목을 조여 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나라의 문을 닫아걸고 일부 근대화에 눈뜬 인재마저 씨를 말렸다. 반면 이웃 일본은 문을 활짝 열고 근대화의 길로 들어섰다. 

고종은 국제정세에도 눈이 어두웠다. 당대의 패권국이던 영국과 손을 잡지 않고 러시아와 손을 잡으려 했다. 1895년에 불행한 왜변을 겪었다고는 하지만 이듬해 2월11일 새벽에 궁궐을 몰래 빠져나와 러시아공사관으로 간 것은 잘못이었다. 일국의 왕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왕은 어리석게도 1년이나 거기에서 있었다.

아관파천을 본 영국은 6년 뒤인 1902년에 영일동맹을 맺어 조선을 일본의 손에 넘겼다. 만약이지만 그 때 고종이 영국과 손을 잡았더라면 적어도 일제식민지만은 면하지 않았을까? 

영일동맹 2년 뒤의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발틱함대를 전멸시켰다. 다음해에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5년 뒤에는 나라마저 집어삼켰다. 식자층은 말한다. 만약 러일전쟁 때 러시아가 승리했다면 조선은 러시아의 식민지가 됐을 거라고 말이다.

지금이 마치 구한말과 같다는 이야기들이 언론을 비롯해서 많이 떠돈다. 우리나라 주변의 국제정세가 심상치 않다고 한다. 전통적 혈맹국인 미국과 중국이  다투며 서로 자기편이 되라고 압박하는데도 정부는 어정쩡하다. 혈맹인 미국과의 관계가 예전과 같지 않다고들 말한다. 일본이 경제보복을 해 오는 것도 정부가 자초한 면이 없지 않다. 외교력 부재거나 외교함량의 미달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정권은 또 멀리 밖을 보지 못하고 안에서 과거사에 얽매인 채 지지고 볶으며 편을 가르고 있다. 국민통합은커녕 오히려 국론을 분열시키는 양상이다. 정권이 더 이상 현명하지 못한 판단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라가 어려울수록 안으로 국론을 통일하고, 밖으로 외교력을 높여야 한다. 미국과의 혈맹관계도 더 튼튼히 다져야 한다. 시라쿠사는 반면교사의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시라쿠사의 우매한 왕은 우방을 배반한 대가로 나라를 잃었다.

구한말의 고종은 국제정세에 눈이 어두웠고, 국가의 미래비전도 제시하지 못했다. 안에서만 지지고 볶았다. 작금의 시대상황이 구한말과 같다는데 결코 고종의 길을 따라가서는 안 될 것이다. 

국민은 누구나 생명이 존중되는 사회, 자유롭고 부강한 독립된 나라에서 살기를 원한다. 하지만 이는 시민의식이 투철한 국민일 때 가능하다. 행여 정권의 배가 그릇된 길로 빠지려들면, 거센 물결을 일으켜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 정권은 한낱 배에 불과하고, 국민은 배를 띄우는 바다이기 때문이다. 

어느 정권이던 간에 나라를 국민들의 뜻에 반하는 길로 끌고 가려고 한다면, 종국에는 깨어 있는 시민들의 거센 저항을 받을 게 분명하다. 따라서 국민들의 행·불행이 달려 있는 국가대사는 현명한 판단에 의해 현명한 결정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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