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광복회장으로 돌아온 김원웅의 ‘인생 3막’
정치인→자연인→충청 출신 첫 광복회 수장으로

대전 대덕구 3선 국회의원을 지낸 김원웅 전 의원이 지난 1일 21대 광복회장으로 취임했다. 정치인에서 자연인, 광복회장으로 인생 3막을 연 김 회장을 광복회관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대전 대덕구 3선 국회의원을 지낸 김원웅 전 의원이 지난 1일 21대 광복회장으로 취임했다. 정치인에서 자연인, 광복회장으로 인생 3막을 연 김 회장을 광복회관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그와 노무현이 동지였던 것처럼, 백범과 약산이 걸었던 길도 어쩌면 한길이 아니었을까.’ 그와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그의 이름은 김원웅(75)이다.

전국구 스타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대전 정치판에서만큼은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는 보수 성향이 강한 대전 대덕구에서만 3선(14대, 16대, 17대) 국회의원을 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이인구 전 계룡건설 명예회장(13대, 15대 의원)이 그의 맞수였다.

민주당은 그가 퇴장한 대덕구에서 17대 이후 치러진 4번의 선거에서 한명도 배지를 달지 못하고 있다. 18대는 김창수(자유선진당), 19대는 박성효(새누리당), 19대 재보선과 20대는 정용기(자유한국당)의원이 가져갔다.

진보 불모지 대덕에서 민주당 후보로 3선 당선
18대 총선, 지방선거 낙선 이후 정치권 떠나
강원도에 약초학교 세우고 10년간 자연인 삶

누구도 출마를 주저했던 대덕에 민주당의 첫 깃발을 꽂으면서 그는 ‘개혁의 아이콘’으로 불렸다. 1998년 종로 재‧보궐 선거(15대) 당선 6개월 만에 ‘지역주의 타파’를 외치며 사지(死地)인 부산행을 택했던 ‘바보 노무현’처럼.

김원웅은 18대 총선 낙선에 이어 2010년 지방선거에서 대전시장 후보로 출마했으나 떨어졌다. 연이은 낙선 이후 그는 홀연히 떠났다. 10여 년 전 노무현 등과 함께 낙선하면 농사나 지으려고 강원도 인제에 사뒀던 땅(약 3000평)이 있었다. 거기서 평소 관심이 깊었던 약초를 기르고, 약초관리사 양성교육을 하는 ‘허준약초학교’를 세웠다. 그는 10년 동안 ‘자연인’으로 인생 2막을 열었다.

그는 “15대 총선에서 낙선하고 ‘꼬마 민주당’ 출신들과 돈을 모아 ‘하로동선(夏爐冬扇)’이란 식당을 했다. 내가 대표였고, 노무현이 감사였다”며 “15대 총선에 떨어지면 농사나 지을 생각으로 노무현, 제정구에게 땅을 사자고 했다”고 말했다.

충청도가 아닌 연고도 없는 강원도에 땅을 산 것도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과 관계가 없는 지역을 찾다보니 강원도를 찾게 됐고, 서울에 나올 일도 없으니 산속 깊은 곳으로 알아봤다”고 했다.

독립운동가 양친, 백범 김구 중매로 ‘결혼’
김원봉 서훈 논란에 “월북 아닌 남한에서 쫓겨난 것”
“친일 뿌리 두고 분단에 기생한 세력 청산에 광복회 앞장”

그런 그가 2019년 6월, 21대 광복회장으로 여의도(광복회관)로 돌아왔다. 충청 출신 첫 광복회장이다. 그의 부친은 조선의열단 김근수 선생, 모친은 여성 광복군 전월선 선생이다. 그의 양친은 백범 김구 선생 중매로 결혼했다.

김 회장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약산 김원봉의 서훈 논란을 김구 선생과 비교하며 열변을 토했다.

“내가 아는 김원봉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순수한 민족주의자다. 김구와 다른 건 ‘무장투쟁주의자’였다는 정도다. 김원봉은 해방 이후 남쪽으로 왔다. 남쪽에서 살려고 왔는데, 노덕술 같은 친일경찰이 수사과정에서 수모를 줬다. 또 친일경찰은 테러리스트와 연계해 암살시도도 했다.”

그는 “만약 약산이 월북을 안했다면, 김구나 여운형처럼 제대로 못 살았을 것이다. 김원봉은 자진 월북 했다기보다 쫓겨난 것과 마찬가지”라며 “김구 선생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면서 ‘어떠한 불이익이 있더라도 남한 단독정부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했다. 김구 선생이 살아 계셨다면 남한에서 주는 훈장을 거부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올해 현충일 기념사 핵심은 백범과 약산이 힘을 합쳐 임시정부 대표성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조선의열단을 빼면 굉장히 빈약해진다. 그런 면에서 (보수진영이)김원봉을 부정하는 건 이해되지 않는다.”

김 회장은 최근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일본의 독립군 ‘토벌’에 악명 높았던 간도특설대에서 활동한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을 예방한 것을 문제 삼았다. ‘반역’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강하게 비판했다.

“간도특설대 대장은 일본인이었지만, 정보와 첩수를 하는 대원은 조선인을 내세웠다. 그들의 만행은 말도 못할 정도로 악랄했다. 붙잡힌 여성독립군을 강간도 했다. 주 활동무대인 연변지역에서 3125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중 85%가 조선인 독립군이다. 그들 총칼에 희생된 독립운동가는 뭐가 되느냐. 그런 사람을 찾아간다는 얘기가 반역행위이다.”

김 회장은 “독립운동사는 지난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이고, 미래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들은 과거에는 일장기를 흔들고, 지금은 성조기를 흔든다. 그들이 주장하는 논리는 놀라울 정도로 남북을 이간질시킨다. 마치 일본의 아베와 같다. 친일에 뿌리를 두고 분단에 기생해 온 정치세력, 언론, 학계, 법조계, 군대를 청산하는데 광복회가 앞장서겠다.”

그는 국회의원 시절에도 독립운동가 후손이라는 가족사적 배경으로 통일외교통상위원회(지금의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주로 활동했다.

“통일외교통상위에 8년 있었다. 그 기간 외교부장관이 9명 바뀌었다. 노무현 대통령 초기 행자부장관을 제의받았지만 고사했다. 그런(독립운동가) 집안이기 때문에 한반도가 외세에 의한 분단을 극복하는 작은 돌이라도 놓고 싶었다. 그런데 그 상임위는 인기가 없어 후원금이 잘 안 들어와 지역구민들에 싫은 소리도 많이 들었다. 또 지역구인 대덕은 대전 동쪽이라 그런지 유독 영남 출신이 많다. 내 앞에도 진보 정치인이 당선된 적 없고, 그만두고도 보수당이 당선됐다. 그래도 막강한 이인구 의원을 꺾고 3번을 뽑아줬으니 대덕구민에 고맙다. 만약 서구나 유성구 같았으면 벌써 6선은 했을 거다.(웃음)”

“다시 태어나도 정치는 안해..정치 사회변혁 역할”
“지역 후배 정치인, 무사즉강 원칙 챙겨야” 조언

김 회장은 이날 인터뷰에서 지나온 정치 역정과 앞으로 광복회가 나아갈 방향을 밝혔다. 동시에 지역 후배 정치인들에 덕담도 잊지 않았다.
김 회장은 이날 인터뷰에서 지나온 정치 역정과 앞으로 광복회가 나아갈 방향을 밝혔다. 동시에 지역 후배 정치인들에 덕담도 잊지 않았다.

그는 다시 태어나도 정치는 하지 않겠다고 했다. “10년 동안 정치 유혹을 뿌리치고, 농사짓고 살아왔다. 조선의열단 강령을 쓴 단재 신채호 선생이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라고 했다. 나 역시 그런 역사관을 갖고 있다. 다시 태어나면 정치인은 아니어도 정치와 사회를 변혁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 원로로서 지역 후배 정치인들에 조언을 부탁했다. 그러자 그는 부친의 유훈을 소개했다.

그는 “아버지께서는 내가 정치하는 걸 반대했다. 마흔 네 살에 대전에서 국회의원 한다고 사무실 내고, 꼬마 민주당을 하니 더 이상 못 말렸다. 그때 아버지께서 써 준 글이 ‘무사즉강(無私卽强)’이다. 사사로움이 없어야 강할 수 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과거 386이 지금 586으로 사회 중심이 됐다. 국회의원 3선, 4선하고 지도부(최고위원)활동도 했다. 독립운동한 사람들이 탄압에 무너진 사람은 별로 없다. 유혹에 무너졌다. 마찬가지로 학생운동 했던 친구들이 운동했을 때 탄압당한 것만 자랑하듯 얘기할 때는 지났다. 기득권이 됐으니 유혹에 무너지지 말아야 한다. 국회의원이면 여든 야든 한 부분이다.”

김 회장은 “촛불혁명이 있기 전 대학 총학생회 초청으로 역사의식과 관련한 강연을 다녔다”며 “그런데 한 후배 검사가 박근혜 정부에서 나를 내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써 준 ‘무사즉강’ 신념 덕분에 계좌추적과 온갖 사찰에도 안 걸렸다”고 말했다.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도 그거다. 적당히 즐기고 기득권에 포함돼 안주한다면 모를까, 젊은 시절 꿈과 이상을 실현하고 세상을 바꾸려면, 무사즉강 원칙으로 자신을 챙겨야 한다.”

광복회장은 4년 임기에 연임이 가능하다. 하지만 김 회장은 일찌감치 연임을 거부했다. 회장 선출방법이 비민주적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전국 광복회원 8600명 중 대의원 80명을 뽑아 선거를 하는데, 그 중 30명을 현직 회장이 임명한다. 현 회장이 10표만 더 얻으면 연임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연임을 안 하려고 정관을 바꿀 생각이다. 회장이 가진 기득권을 포기하면서 민주적으로 바꾸겠다.”

김 회장 취임 일성은 간단명료하다. “잠자는 광복의 어깨를 흔들어 깨우겠다”는 것이다. 거칠게 표현하면 ‘꼰대들 모임’을 국가 정통성의 중심에 서는 조직으로 만들겠다는 게 그의 목표이다. “지금 한국사회가 변혁기인데, 항일독립운동이 통일과 연결돼야 한다. 독립운동가가 꿈꿨던 나라는, 하나 되고 통일된 자주독립국가의 완성이다. 그런 나라를 만드는데 노력하겠다.”

김 회장은 중국 충칭(중경)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해방 후 부모와 귀국해 대전에서 터를 잡았다. 대전중, 대전고를 나와 서울대 정치학과(학사)를 졸업했다. 중화민국(대만) 정부의 장학금으로 중국 국립 정치대학 대학원에서도 유학했다.

대학 시절 박정희 정부의 한일조약체결 반대운동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졸업 후 집권당인 공화당 사무처 공채에 합격하며 정당생활을 시작했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생긴 민자당 합류를 거부하고, 노무현, 이철, 박찬종 등과 ‘꼬마 민주당’을 창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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