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규슈 나고야 성
[119] 규슈 나고야 성
  • 정승열
  • 승인 2019.06.17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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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열 법무사
정승열 법무사

 일본에는 ‘나고야’라는 이름을 가진 성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아이치 현(愛知県)의 나고야 성(名古屋城)이고, 다른 하나는 임진왜란 때 조선 침략의 출병지였던 사가 현 나가쓰시의 히젠나고야 성(肥前名護屋城)이다.

159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7~1598)는 조선에 명나라를 정벌할 길을 비켜달라는 요구(征明假道)를 하였으나, 조선이 거절하자 그해 10월 구마모토의 번주(藩主)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 1562~1611)와 심복 데라자와 히로타카(寺沢広高: 1563~1633)에게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가라쓰에 성을 쌓도록 명령했다. 


 

1. 나고야성 터
1. 나고야성 터

1-1. 나고야성 지도
1-1. 나고야성 지도

2. 나고야 성 가는길
2. 나고야 성 가는길

가토와 데라자와는 규슈의 여러 다이묘를 독촉하여 착공한지 5개월만인 1592년 음력 3월에 성을 완성했는데, 성의 규모는 50만 평이나 되고 성곽 둘레는 5km나 되었다. 이것은 당시 도요토미 막부가 있는 오사카 성 다음가는 규모이었다. 

선조 14년(1592) 음력 4월 13일, 부산 동래성에 상륙하여 벌어진 전후 7년간의 전쟁은 수많은 인명과 재산을 파멸시키고 조선을 황폐화시키다가 1597년 8월 도요토미의 죽음으로서 끝이 났다.

조선을 전기와 후기로 가르는 전환점이 된 전쟁은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가 출현하고, 조선을 지원했던 중국대륙에서는 명이 망하고 청이 들어서는 등의 동북아를 뒤바꾼 국제 전쟁이었지만, 일본에서는 당시 일왕의 연호를 따서 ‘분로쿠게이츠노에키(文禄·慶長の役)’이라고 말한다.

비천한 가문 출신 도요토미는 최대의 실력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의 밑에서 충성하다가 1562년 6월 그가 죽자 정권을 장악했다.

도요토미는 1590년 시코쿠(四國)와 규슈(九州)를 평정하여 천하를 통일했으나, 본래 영지를 가진 다이묘 출신이 아니어서 반발 기미가 있는 다이묘들의 관심을 대외로 돌리고, 중국에 풍부한 은(銀)을 독차지하여 부강한 나라를 만들 속셈으로 조선과 명 정벌을 꿈꿨다. 

당시 조선은 부산포, 내이포(진해)· 염포(울산) 등 삼포를 개항하고 거주 왜인을 60명으로 제한했지만, 점차 그 숫자가 늘어나자 이들에게 귀환을 명령하고 통제를 강화하자 1510년 4월 3포에서 폭동(三浦倭亂)을 일으켰다.

이후 부산포만 왕래를 허가했지만, 1544년 왜선 20여 척이 사량진(통영)을 공격하는 사량진왜변 이후에는 왜인의 내왕을 전면금지했다. 그러나 1547년 대마도주의 간청으로 정미약조를 체결하고, 일본 국왕의 허가증을 가진 선박에 한하고, 세견선은 대선 9척, 중·소선 각 8척으로 제한했지만, 1555년(명종 10년) 다시 을묘왜변이 벌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1587년 도요토미는 조선과 밀접한 대마도주 소요 시토시(宗義智)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도록 명령했다. 대마도주는 일본의 조선 침략이 무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를 거절하지 못하고, 조선에게는 도요토미가 일본의 국왕이 되었으니 이를 축하하는 통신사를 파견해달라고 허위로 요청했다. 조선에서는 처음에는 이를 거절하다가 유성룡과 이덕형 등의 건의로 1590년 3월, 서인 황윤길을 정사, 동인 김성일을 부사로 하여 일본에 보냈다.

약 1년 만에 귀국한 정사 황윤길은 도요토미가 병선과 군사를 늘리는 등 전쟁준비를 하고 있다고 보고하지만, 부사 김성일은 왜국은 조선을 넘보지 못할 상태라고 말한다. 이렇게 두 사신의 엇갈린 주장에 조정은 또다시 분쟁이 일어나지만, 결국 조선은 김성일의 보고를 받아들여 전쟁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는다. 

2-3. 다이묘의 숙영지
2-3. 다이묘의 숙영지

가라쓰에 성이 완성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도요토미가 즉시 교토에서 달려와 성을 둘러보고 이곳을 히젠나고야성(肥前名護屋城)이라고 명명했는데, 히젠이란 현재의 규슈 사가현의 지명이다. 도요토미는 이곳을 조선침략 전초기지로 삼고, 1592년 3월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동원령을 내렸다.

음력 4월 1일, 도요토미는 나고야 성에 집결한 15만8천명을 9군으로 나누고,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573~1603),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1568 ~1623)를 선봉장으로 삼아 조선 침략을 명령했는데, 이때 조선 침략에 반대하는 천주교도이자 온건파인 고니시와 불교도이자 강경파인 가토에게 각각 선봉장을 맡겨 충성 경쟁으로 조선정벌을 신속하게 끝낼 것을 의도하면서, 가토와 함께 나고야성을 쌓았던 심복 데라자와 히로다카를 초대 가라쓰번(唐津藩)으로 임명하여 히젠나고야성에서 왜군의 보급과 병력수송 등의 임무를 맡겼다.

동래성에 상륙한 왜군은 행군하듯 진격하여 불과 보름 만에 한양에 입성했지만, 명의 지원군과 조선 각지에서 의병의 항거로 전쟁상태가 교착되면서 이듬해인 1593년 음력 4월 강화교섭이 성립된다.

그러나 강화조건에 불만인 도요토미는 1597년 음력 2월 다시 14만의 대군을 파견하면서(정유재란), 장기전에 대비하여 한반도 남부에 성을 쌓도록 명령했다. 이로서 한반도 남부에는 무려 26개의 왜성을 쌓았으나, 현재는 전남 순천왜성과 울산왜성 두 군데만 흔적이 남아있다.

2-1. 나고야성터
2-1. 나고야성터

전쟁기간 동안 도요토미는 나고야 성에 1년 2개월이나 머무르며 전쟁 상황을 보고받았으나, 1598년 음력 8월 그가 죽으면서 전쟁은 끝나고 나고야 성의 역할도 끝났다. 조선에 출병하러 전국에서 모인 장군들의 진영이었던 나고야 성터는 일본정부에서 특별사적으로 관리하고 있는데, 1993년에는 전쟁자료들을 모아서 성안에 사가현립 나고야성 박물관을 설립했다. 

후쿠오카에서 도시고속도로를 타고 가라쓰까지 약1시간가량, 가라쓰 시내에서 국도 204호를 따라 약 30분가량 가면 나고야성 박물관이다. 열차로 JR가라쓰 역 도착했다면, 시내버스를 타고 박물관 입구에서 내려 약 5분가량 가면 된다. 주차비와 입장료는 모두 무료이지만, 나고야 성터 관람에는 100엔의 입장료가 있다. 

쓰라린 왜군의 침략을 받았던 조선의 후예로서 공격자의 아성을 바라보는 마음은 참으로 참담하기만 했다.

3. 나고야성박물관
3. 나고야성박물관

3-1. 도요토미 초상
3-1. 도요토미 초상

3-2. 조선출병지령서
3-2. 조선출병지령서

3-3. 왜선
3-3. 왜선

4. 거북선
4. 거북선

4-1. 이순신 장군 초상
4-1. 이순신 장군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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