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용 칼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9월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9월 평양공동선언' 발표 후 악수하고 있는 모습. 자료사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9월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9월 평양공동선언' 발표 후 악수하고 있는 모습. 자료사진

일본에 대해 말할 때, ‘일본인’은 괜찮은데 ‘일본’이라는 나라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일본인처럼 겸손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국민들도 보기 드물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이루고 있는 ‘일본이라는 나라’는 일본인의 이런 모습과는 거리가 너무 멀다. 이런 차이는 일본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주변에서도 이런 현상을 쉽게 볼 수 있다. 지역차별문제 조직이기주의 부서이기주의 집단이기주의 같은 현상도 이와 무관치 않다. ‘개인은 도덕적일 수 있어도 그런 개인들이 모여 만든 사회는 비도덕적일 수 있다’는 라인홀트 니부어의 주장은 이런 현상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준다. 도덕적인 사람조차 집단(조직)에 들어가면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게 되면서 비도적덕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선한 개인도 조직에 들어가면 왜 변하는 것인가? 사람들은 웬만큼 낯이 두껍지 않으면 대놓고 자기 이익을 내세우지 못한다. 얼굴에 철판을 깐 사람들만 대놓고 자기 이익을 따지고 든다(지금도 맞는 말인지 의문이긴 함). 그러나 도덕 군자도 조직의 일원이 되면 180도 달라질 수 있다. ‘내 이익’이 아니라 ‘조직의 이익’을 명분으로 내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보훈 유족 청와대 불러 놓고 모욕한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의 말과 행동 중에는 ‘개인과 집단의 논리’로 이해하면 납득이 쉬운 경우가 많다. 보통 정치인들도 그런 경우가 있긴 하나 문 대통령은 특히 그렇다. 지난 4일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문 대통령은 현충일을 앞두고 천안함과 연평해전 유족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베풀었다. 그런데 청와대는 오찬 테이블에 문 대통령 부부와 김정은 부부가 나란히 찍은 홍보물을 내놨고 한다.

북한은 함께 통일을 추구해 가야 할 대상이 분명하지만, 그날 청와대가 천안함 연평해전에서 김정은 정권에 의해 아들과 남편을 잃은 유족에게까지 김정은과의 우의를 강조하는 것은 홍보가 아니라 모욕이다. 유족들은 밥이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연평해전에서 남편을 잃은 김한나씨는 “보훈행사에서 남편을 죽인 사람의 사진을 봤다”며 울먹였다고 한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아무리 독한 정권이라도 이런 짓은 안 한다. 

그런데 정치인 치고는 ‘맑고 선한 사람’으로 보이던 ‘문재인’이라는 사람이 주인으로 있는 청와대에서 이런 황당한 일이 일어나는가? 대통령이 그런 사진을 유족 홍보물에 넣자고 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에 의해서 그 사진이 유족 오찬 메뉴로 ‘선정’되었을 것이다. 일부러 골랐든 무심코 넣었든 그 사진은 작금 문재인 청와대가 홍보하고 싶어하는 메시지라는 건 분명하다.

혹시, 유족에게 선물한 ‘특별한 오찬 메뉴’가 언론에 보도되고 북쪽까지 전달되어 김정은 마음을 움직여, ‘북핵 문제’가 풀리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거룩한 뜻’에서 이런 사진을 넣었다고 하더라도 납득하기 어렵다. 북핵 문제는 그렇게 풀릴 일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졌고, 무엇보다 우리를 지키다 희생한 전사자의 유족을 모욕해서라도 북측의 환심을 사려했다면 그런 발상 자체가 경악할 일이다. 청와대가 북한에 매달리기만 하니까 이런 의문까지 갖게 된다.

김정은 사진 홍보물이 고의가 아니라 해도 심각한 일이다. 청와대는 그날 행사가 누구를 위한 것이며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았거나 못하고 있었다는 뜻 아닌가? 어떤 일 때문에 사적으로 사람을 만나는 경우에도 상대의 처지를 한번을 생각하고 말을 한다. 그를 위로하기 위한 자리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오직 자기 생각만 하는 사람은 그런 게 눈에 안 보이기 때문에 황당한 실수를 하게 된다. 김정은 사진 홍보물이 고의든 실수든 근본 원인은 다르지 않다. 문재인 청와대가 오직 ‘우리 입장’ ‘우리 생각’에만 빠져 있는 데서 생기는 문제다.

‘집단의 비도덕성’이 모욕의 원인일 수도

문재인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 대통령이 된 직후까지도 – ‘고집센 사람’보다는 ‘선한 사람’ ‘도덕적인 사람’의 이미지가 컸다. 정치인은 지방의원을 해도 정치에 입문할 때부터 대통령이 꿈이라는데 그는 남들이 대선후보로 떠밀 때도 선뜻 나서지 않은 ‘선한 사람’이었다. 그의 진심이 어떠했든 그에겐 그런 이미지가 있다. 한때 80~90%에 이르던 대통령 지지율도 그런 이지미가 한몫 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아집의 그림자가 그의 얼굴에 어른거렸다. 그의 ‘고집’은 최측근도 인정하고 있다. 문 대통령의 최측근인 민주당민주연구원장은 얼마 전 토크콘서트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 누가 더 고집이 센가”라는 질문에 “문대통령 고집이 훨씬 세다. 참모들 의견을 수용은 하지만 절대 안 꺾는 게 있다”고 했다. 자영업자들을 울리고 있는 최저임금 정책도 그런 고집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런 고집 때문에 나라경제가 거덜나고 있는 데도 대통령이 ‘변화는 없다’고 하자, 마침내 한 기자가 “그런 자신감은 어디서 오느냐”고 묻기에 이르렀다. 고집의 근원을 물은 것이다. 대통령의 답은 없었지만, 참고할 만한 증언이 하나 근래 나왔다. 장기표 씨는 한 인터뷰에서 ‘문 대통령이 운동권의 포로가 되어 그쪽의 강경한 주장을 따라가고 있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이 말이 사실인지 알 수 없으나 ‘문 대통령의 고집과 작금의 정치현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장씨 주장에 따르면 최소한 문 대통령이 운동권이란 ‘집단’의 생각에 맞추어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는 뜻이고, 더 나아가면 문재인 정부는 ‘집단권력 시스템’으로 가동되고 있다는 말로 해석될 수도 있다. 대통령은 운동권 집단의 아디이어와 정책이 국가와 국민 전체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신념도 가졌을지 모른다. 어쩌면 운동권이 권하는 길이 정답일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대통령이 특정 한 집단에만 귀를 대고 있으면 위험하다. 거기에서 나오는 고집과 독선의 폐해는 더욱 심각하기 때문이다.

누군가(혹은 특정집단)가 최고 최상의 답안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거기에만 의존해선 안 된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명분이고 원리다. 민주주의는 ‘확실하고 좋은 결론’보다 ‘덜 확실해도 좋은 과정’을 더 중시하는 제도다. 대통령이 유족을 위로하는 자리서조차 도리어 모욕을 하게 된 건 단순 실수가 아니다. 니부어가 말한 ‘집단(조직)’의 비도덕성에서 나오는 현상으로 보인다. 사람도 비정한 경우가 많지만 조직의 비정함은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다. ‘위험한 조직’ 문재인 정부는 지금 어디로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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