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재민의 정치레이더72] 정치권의 ‘품격회복’을 기다리며

‘짓’의 사전적 의미는 ‘몸을 놀려 움직이는 동작’입니다. ‘눈짓’, ‘손짓’, ‘발짓’, ‘날갯짓’ 같이요. ‘짓’은 그러나 주로 좋지 않은 행위나 행동을 이를 때도 씁니다. 예를 들어 ‘허튼 짓’, ‘못된 짓’, ‘나쁜 짓’, ‘잔인한 짓’이라는 표현처럼.

지난 18일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 문재인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독재자의 후손이 아니라면 5.18을 다르게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자유한국당은 ‘독재자의 후예’라는 발언이 꽤나 거슬리고 거북했나 봅니다.

그도 그럴 것이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정국에서 더불어민주당이 내건 현수막에 한국당을 겨냥해 ‘독재자의 후예’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다분히 자신들을 겨냥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 연장선에서 정치권은 황교안 한국당 대표가 “김정은 대변인 짓”이라고 했다, 안 했다를 놓고 공방을 벌이고 있습니다.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은 21일 춘추관 정례 브리핑에서 황 대표의 ‘짓’ 발언 논란에 “말은 그 사람의 품격을 나타낸다는 말로 갈음 하겠다”며 우회적으로 비판했습니다. 이재정 민주당 대변인은 “공당의 대표가 할 짓이냐”고 발끈했습니다. ‘짓’을 ‘짓’으로 받은 겁니다.

황 대표는 “나는 김정은 대변인이라고 했지, 대변인 ‘짓’이라고는 안했다”고 해명했습니다. 저도 영상을 통해 해당 발언을 열 번 가량 들어봤는데요. 발음이 정확치 않아 뭐라고 단언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황 대표는 발언 도중에 앞에 있던 청중이 ‘짓’이라는 말을 해서 그걸 인용했다는 겁니다.

황 대표가 ‘짓’이라고 했든 하지 않았든, ‘짓’이 정치권에 불러일으킨 논란은 꽉 막힌 정국을 더 막히게 만들었습니다. 패스트트랙 정국으로 파행 중인 국회를 정상화해보겠다며 여야 3당 원내대표가 맥주잔을 부딪친 뒤라서 더 안타깝습니다.

청와대는 야당, 야당은 청와대를 향해 서로 ‘독재’라고 하고 있습니다. 품격을 지켜 국민에게 본(本)을 보여야 하는 정치권이 ‘막장’으로 치닫는 것 같아 또 안타깝습니다. 저는 그냥 이 속담으로 갈음하렵니다. ‘똥 묻은 개 겨 묻은 개 나무란다.’

앞서 언급한 ‘막장’이라는 말은 ‘갱도의 막다른 곳’을 일컫습니다. 이 막장을 이국종은 ‘중증외상환자수술 방’<골든아워 1>으로, 김훈은 정치판에서 ‘남을 막장으로 밀어 넣고 자신은 갱도 밖으로 달아나려는 난장판’<연필로 쓰기>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패륜과 불륜, 음모와 배신, 복수가 난무하는 TV 드라마에서 주로 접한 ‘막장’이란 말이 정치권을 상징하는 일상용어로 전락하는 광경을 보는 국민들도 참 안타까울 것 같습니다. 막장의 정치는 플러스가 아닌, 마이너스 정치인 까닭입니다.

막장이 판치는 현실 정치에서 선거는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쩌면 ‘짓’과 ‘짓’이 부딪치고 있는 지점도 내년 총선일지도 모릅니다. 각자 지지층의 결집을 이끌어내려면 보다 ‘센 말’을 구사하거나, 그에 버금가는 말을 던져야 밀리지 않는다는 신념이라도 가진 모양입니다. 하지만 국민들은 그들의 언어를 ‘막말’이라고 부릅니다.

‘막말’도 강도(剛度)가 제각각이어서요. 웬만한 막말이 아니면 막말 축에도 끼지 못할 정도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정치권에서는 ‘막말’이 품격 있는 언어보다 빠르게 대중의 이목을 끌어 왔습니다.

그렇다보니 일류(유명)대학 나와서 금배지 차고, 걸어 다니는 헌법기관이라는 국회의원들이 조폭 조직에서나 쓰는 막말을 입에 달고 다니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국회를 빛낸 바른 정치언어상’이 만들어졌을까요? ‘사이코패스’라고 한 당의 대표가 방송을 통해 다른 당 대표를 향해 ‘사이코패스’라고 하고, 심지어 대통령을 ‘한센병 환자’로 비유합니다.

<언어의 줄다리기>를 쓴 신지영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는 최근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막말은 동물국회에는 정말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하는데, 국민들은 동물국회를 만들기 위해 세금을 낸 적이 없잖아요. 막말 정치는 국민들의 수준을 매우 우습게 보는 것이다. 깨어 있는 국민들이 이걸 다 알고 있다.”

정치인의 언어 수준은 그 나라 국민들의 언어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정치하는 분들께 감히 요청합니다. “공부 좀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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