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창호의 허튼소리] 수필가, 전 부여군 부군수

나창호 수필가(전 부여군 부군수).
나창호 수필가(전 부여군 부군수).

제자가 3000명이나 되는 공자가 훌륭한 것은 제자들의 성품과 수준에 맞는 교육을 했다는 점이다. 원래 껄렁패였던 자로(子路=仲由)는 공자의 훈계로 학문을 하고, 공자의 제자가 된 사람이다. 체격이 건장하고 용맹해서 늘 공자의 곁을 지키며 보디가드 역할을 했다. 공자가 주유천하를 할 때도 공자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자로에게는 나쁜 버릇이 하나 있었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아는 체를 잘했다. 어느 날 공자가 자로를 깨우치고자 했다.

“유(由)야, 너에게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랴?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바로 아는 것이다.”(子曰 由, 誨女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불치하문(不恥下問).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느 날 제자 자공이 공자께 묻는다. “공문자는 무엇 때문에 문(文)이라는 시호를 붙였습니까?”(子貢問曰, 孔文子何以謂之文也?)

자공이 이렇게 묻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위(衛)나라의 대부였던 공어(孔圉)는 남의 아내를 강제로 빼앗는 등 평소에 행실이 좋지 않았다. 이같이 인간성이 좋지 않은 사람에게 죽은 후라도 문(文)이라는 시호를 붙이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것 아니냐며 (의아해서) 물은 것이었다.

공자가 대답했다. “그는 영민하면서도 배우기를 좋아해서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시호를 문이라고 한 것이다.”(子曰, 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謂文也) 한마디로 배우려는 자세가 최상이었다는 것 아니겠는가. 

성인 공자도 모르는 것이 있었다. 공자가 진(陳)나라로 가는 길에 누군가로부터 진귀한 구슬을 얻었다. 아홉 번이나 구불구불 구비 지는 구멍이 뚫린 구슬이었다. (실제로 이런 구슬은 없었을 것이다. 실로 꿰지 못하는 아홉 구비 지는 구멍을 어떻게 뚫었겠는가. 공자도 모르면 묻는다는 말을 만들기 위해 상상한 구슬이 아닌가 싶다.)

공자가 이 구슬을 실로 꿰려고 여러 번 시도해봤지만 도저히 꿸 수가 없었다. 몇 날을 고민하던 공자는 길 가는 도중에 뽕밭에서 뽕을 따는 아낙네를 보자, 체면불구하고 찾아가서 실 꿰는 방법을 묻는다. 뽕따던 아낙네는 구슬 구멍의 한 쪽에 꿀을 바르고, 개미허리에 실을 매어 반대편 구멍 속으로 밀어 넣으라고 가르쳐 준다. 공자는 아낙네가 가르쳐준 방법으로 구슬에 실을 꿸 수가 있었다. ‘공자가 구슬을 꿴다.’는 공자천주(孔子穿珠)라는 말의 유래다. ‘학문이 아주 높은 사람도 남에게 배울 게 있다’는 뜻의 말이지만,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다’라는 불치하문과 같은 뜻을 품고 있다. 

아마도 공자가 살았던 2500여 년 전의 중국춘추시대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묻는 것을 무척 싫어했던 것 아닌가 싶다. 그래서 이런 말이 생기지 않았을까. 

남의 아내를 빼앗을 정도로 인간성이 고약한 사람도, 단지 모르는 것을 아랫사람에게 물었다는 이유로 죽은 후에는 그 허물을 덮어주고, 공자 같이 학식이 풍부한 사람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여자에게 까지 묻는다는 말을 남기고 있으니 말이다. ‘모르면 누구에게라도 물어보라’는 뜻 아니겠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에게 묻는 것을 유독 싫어한다고 한다. 심지어 모르는 길도 묻지 않고 끝까지 혼자 찾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자존심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시간 낭비가 아닐 수 없다. 하기야 요즈음의 젊은이들은 휴대폰으로 길 검색을 하면서 손쉽게 길을 찾아간다고 하지만, 나이든 사람들은 휴대폰 다루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며칠 전, 갈마역에서 지하철을 내려 밖으로 나오는 계단을 반쯤 오르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정부청사역이 어디냐?”고 묻는 것이었다. 깜박하고 한 구간을 더 온 모양인데, 나이가 지긋한 분이었다. 나는 “반대편으로 가서 한 구간만 도로 가시면 된다”고 했다. 계단을 마저 올라와 뒤를 돌아보니 노인분이 보이지 않았다. 

아차! 하며 잠시 기다리자니 노인분이 계단 아래로 다시 보였다. 나는 이리 올라오시라고 한 후, 반대편 승강장 내려가는 계단을 가리키면서 그 곳으로 내려가 열차를 타고 한 구간만 가면 정부청사역이라고 일러주었다. “고맙다”고 인사하는 노인분의 표정에서 안도감을 느낀 나는 개찰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아마도 그 노인분은 내가 처음에 반대편으로 가라고 하니까 그 쪽으로 가려고 길을 찾다가 철길에 막혀 갈 수 없음을 알고 계단 쪽으로 다시 오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노인분이 지하철을 처음 탔다면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던 것이다.

나는 길을 알려 줄 때 내 생각 위주로 쉽게 생각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내가 애초에 나를 따라오라고 한 후 반대편 승강장을 알려주었어야 옳았던 것이다. 나뿐 아니라 누구라도, 누군가 길을 묻는다면 무성의하게 알려주거나, 대충 알려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어렵게 길을 물었는데 만족하지 못한 결과를 얻으면 앞으로 더 이상 길을 묻지 않을 것 아닌가.

솔직히 나도 모르는 길 묻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시간에 쫒기는 급한 경우가 아니면 혼자 찾으려고 하는 편이다. 그런데 앞으로는 모르는 길이 나, 찾아가는 장소를 모를 때는 능동적으로 물어봐야겠다. 알량한 자존심 한 자락 거머쥐고 어렵게 살 일이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고, 사회는 함께 사는 공동체라고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모르는 길은 묻고, 길을 묻는 사람에겐 바른 길을 알려줘야겠다.

저작권자 © 디트NEWS24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