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143]
탈북자 [143]
  • 이광희
  • 승인 2019.04.15 09: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 인석의 부검모습이 떠올랐다. 목주위에 0.5센티미터의 색흔 소견이 보인다는 것이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동일했다. 또 목 졸려 살해되고 난 다음 난자된 것도 같았다. 동일범의 소행이란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검안의는 내게 볼펜을 넘겨주며 손가락으로 빈칸을 가리켰다. 사체가 채린이라는 것을 확인해 달라는 주문이었다.

그들은 장기 미재사건을 남기고 싶지 않다는 것과 한국인 실종사건에 더 이상 매달릴 수 없다는 판단에서 의도적으로 사건을 마무리 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검안서는 사체가 채린이라는 것을 조목조목 명시하고 있었다. 검안의의 능력이 탁월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온전한 형체도 갖추지 않은 주검을 통해 사람의 신원을 확정짓는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지만 그들은 자연스럽게 몰아가고 있었다.

혈액형과 키 그리고 몸매 등이 채린의 주검이 아니라고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건물을 짓고 그것을 바탕으로 설계도를 꾸미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사인을 거부했다. 그곳에 서명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자 그 사내는 내게 다시 눈짓을 했다.

그 눈짓은 먹기 싫은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윽박지르는 모습 같았다.

내가 왜 서명을 해야 하는 겁니까?”

당신 부인의 사체를 확인했으니까요.”

저 사체가 내 아내라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무엇으로 저 사체가 내 아내라고 단정 짓는 거요? 증거가 있소?”

나는 악을 쓰듯 거부했다.

그러자 같이 나왔던 경찰이 실장갑 낀 손으로 자신의 주머니 속에서 무엇인가를 끄집어냈다. 그것은 얇은 비닐 백에 담겨 있었다. 피떡이 된 상태라 무엇인지 쉽게 알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그것은 내 눈앞에 들이댔다.

그것은 하트모양의 작은 목걸이였다.

돌연 현기증이 일어났다.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동안 사체가 아내가 아니라고 간절히 바람 했던 일들이 허사였다. 더 이상 희망과 기대를 가져볼 기회를 주지 않았다. 채린이 어딘가에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며 막연히 믿어온 실낱같은 기대가 일순간에 무너졌다.

그 목걸이는 아내가 러시아로 떠나기 직전에 내가 사준 것이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목걸이가 담긴 비닐을 들었다. 손이 파르르 떨렸다. 확인하고 싶었다. 손으로 조개를 까듯 하트형 목걸이를 열었다. 그곳에는 피로 얼룩진 채린과 나 그리고 아들의 얼굴이 담긴 사진이 들어있었다. 딩동 그리는 음악소리가 애잔하게 들려왔다.

싸늘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할 말이 없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허탈감만이 오롯이 가슴 언저리를 메웠다. 소리를 내며 울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숲 언저리에 선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영원히 눈을 감아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고개를 삐죽이 쳐들었다. 허리춤에 꽂힌 권총을 뽑아 내 관자놀이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 싶다는 충동이었다. 채린을 찾지 못한 채 빈 몸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갈기갈기 찢어진 채린의 사체를 안고 돌아갈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 차라리 이곳에서 채린과 함께 눈을 감는 것이 행복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해맑게 웃는 채린의 모습이 눈앞을 스크린처럼 스쳤다. 사랑스런 그녀의 눈빛이 나를 더욱 외롭게 만들었다.

빅또르 김은 나의 허망함을 달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내게는 아무런 위안도 되지 않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