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용 칼럼]

KBS에 출연해 이승만 전 대통령을 거친 언사로 비판하고 있는 도올 김용옥. KBS  제공.
KBS에 출연해 이승만 전 대통령을 거친 언사로 비판하고 있는 도올 김용옥. KBS 제공.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로 대한항공 오너가 대표이사직을 잃었다. 국민들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오너 일가의 갑질 행태를 생각하면 잘됐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국민연금은 권력의 하수인이라는 점에서 기업에 대한 권력의 갑질은 더 심해질 수 있다는 걱정도 든다. 이 문제는 득과 실이 따르는 문제고, 기업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면 중요한 문제다.

우리에게 이런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연금개혁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소득주도 성장은 정말 효과를 낼 수 있는지 대(對) 북한이나 일본 문제는 어떻게 푸는 게 바람직한지 등 끊임없이 쏟아지는 국가적 사회적 과제가 전부 이런 문제다. 그냥 넘길 수 있는 문제는 없다. 무책임하게 방치하거나 오답을 선택하면 국민들이 고통을 치르게 돼 있다. 

인류의 과제 해결해온 두 주역 정치인과 지식인

자고이래 인류에겐 늘 이러한 과제가 주어졌다. 이런 문제에 관한 한, 두 부류의 집단이 큰 역할을 해왔다. 하나는 정치인(임금)이고 또 하나는 지식인(선비)이다. 대체로 정치인들은 지혜와 지식에서 지식인들을 따르지 못하고, 지식인은 국가라는 조직을 관리하는 데서 정치인에 미치지 못한다. 양쪽이 협력할 때 제 본분을 다할 수 있고 둘 다 빛이 난다.

오늘날 ‘지식인’은 과거의 현인(賢人)과 같은 의미로 쓸 수는 없다. 현인은 지(知)와 덕(德)이 모두 최고 수준에 이른 사람이다. 지금 시대에 그런 지식인은 찾기 어렵고 역할도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자신의 메시지가 최고 권부에게 전해질 정도의 지위에 있는 지식인이라면 말과 행동이 달라야 한다. 도올 김용옥 교수는 적어도 영향력 면에서 그런 지식인의 반열에 드는 사람이다. 

최근엔 KBS 강연에서 이승만을 ‘미국의 괴뢰’라고 말했다가 비판을 받고 있다. 당시 이승만은 미국에 의지해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미국과 심한 갈등을 겪은 사실만으로도 김 교수의 표현은 왜곡이다. 보수 진영에선 반발하자, 그는 “민주사회에서 우리 같은 사상가는 피끓는 억울한 민중의 가슴을 대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북한 소행이라는 천안함 사건 발표 때는 “0.0001%도 못 믿겠다”고 말해 주목을 받았다. 부정은 자유지만 0.0001이라는 ‘감정적 거부’는 신뢰를 떨어뜨린다.

그의 과격한 발언은 종종 진영 논리나 편협한 감정에서 나오는 것으로 사실(事實)과는 다르다는 걸 사람들은 알게 됐다. 이제는 그의 말을 믿지 않은 사람들이 꽤 많을 것이다. 보수 쪽이든 진보 쪽이든 이런 사람은 신뢰하지 않는다. 누가 내 편을 들더라도 자주 거짓말을 한 사람이면 신뢰할 수 없다. 지식인으로서는 이보다 큰 손해가 없다. 

대한민국 ‘내로남불 정의관’ 진단할 지식인 없나

정보와 지식이 넘쳐나는 시대다. 그런데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모를 때가 많다. 정보는 넘쳐나고 지식 장사꾼들은 많아지고 있으나 도리어 혼돈의 시대가 되어 가고 있다. ‘큰 돈이 생긴다면 감옥에 가겠다’는 초등학생들의 말이 농담만으로 들리지 않는다. 정부가 부동산 투기 근절을 외치는 와중에 청와대 대변인이 재개발지역 상가를 샀다면 분명 문제지만, 한편으론 그게 정말 문제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대통령의 말만 믿고 투기를 못하는 공무원만 바보인 나라가 됐다. 대한민국 정의(正義)의 기준은 ‘내로남불’로 바뀐 지 오래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인 시대다. 새로운 정의관(正義觀)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은 청와대와 국회다. 블랙리스트는 체크리스트로 이름만 바뀔 뿐이고, 국회 청문회는 여야가 공수만 바뀔 뿐 전형적인 내로남불이다. 

‘내로남불’은 그리스 철학자가 말했다는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란 주장과 통한다. 대통령이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강조하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나 내로남불로 해석하면 금방 이해가 된다. 청와대 대변인도 정의의 새로운 뜻을 금방 알았을 것이다. 청와대 대변인의 투기 뉴스에,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둘이라고 생각하는 보통 국민들만 어리둥절할 뿐이다.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란 말에 더 깊은 뜻이 있는 줄은 모르나, 글자 그대로 보면 지금 대한민국, 특히 정치판에서 활발하게 실천하고 있는 ‘새 정의론’임이 분명하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장관들은 하나같이 정부가 내세우는 정의 도덕과는 거리가 멀다. 직간접의 권력을 행사하면서 강자 이익을 추구해왔거나 부도덕한 언행을 일삼은 사람들이다. 내각은 정의와 도덕성에서 국민 평균에도 못 치미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필자는 이해가 안 된다. 과거 어떤 정권보다 정의로워 보였던 정권에서 왜 이런 자가당착의 인사나 정책이 과거 정권과 판박이처럼 되풀이 되고 있는지 납득이 안 간다. 연조가 있는 기자가 원인을 ‘정치적’으로 분석해 볼 수는 있겠으나, 더 근본적 원인은 정치학이나 철학 분야의 학문으로 들어가야 알 수 있을지 모른다. 역량 있는 지식인들의 몫이다. 지식인이라면 이쪽 저쪽 눈치 보지 말고 작금 ‘대한민국의 과제’에 매달려야 한다.

충대철학 교수 “우리도 세계에 이로울 사상 내놔야 하는 것 아닌가”

지식인이 현재의 과제에만 매달리는 것은 아니다. 진리 탐구나 자기 수양도 목적이다. 몇 년 전 작고한 충남대 류남상 교수는 진리 탐구에 매진한 학자였다. 60년을 동양철학에 매달렸다. 그가 제자들에게 했다는 말이 지금도 귀에 남아있다. “우리는 2000년 동안 공자와 중국 학문을 배우기만 했는데 우리나라도 전세계를 이롭게 할 무엇인가(사상)를 내놔야 하는 것 아닌가?” 그는 공자에게 배우기만 한 것을 빚으로 여겼다. 

학자적 자부심이 이 정도라면 권력을 대변하는 언사는 상상도 못한다. 본래 학문의 영향력은 정치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한 교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공자와 진시황 가운데 중국에 누가 더 영향을 주었을까? 진시황은 공자의 발뒤꿈치도 못 따라 갈 것이다.” 따져보면 진시황의 권세가 후손들에게 커다란 관광자원을 남긴 것은 맞지만 2000년 동안 중국과 동아시아인들의 머릿속을 지배한 건 권력자 진시황이 아니라 지식인 공자였다.

도올의 고대 스승이었던 김충렬 교수(작고)는 제자 김용옥 학생이 『중용(中庸』을 읽다가 눈물을 흘렸다는 소문을 듣고, “공맹(孔孟)을 뛰어넘을 인물이 될 것”이라고 칭찬했었다고 한다. 스승이 기대한 건 지금의 제자 모습은 아닐 것이다. 물론 도올은 골치 아픈 동양학 등 인문학을 대중에 전달하는 커다란 공을 세우고 있다. 많은 국민들이 그가 제공하는 엄청난 ‘교육상품’을 공짜로 배달받고 있다. 그러나 아쉽다. ‘지식인 김용옥’을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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