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농장에서

628

 

알렉세이가 우리를 초청한 곳은 숲으로 둘러싸인 자신의 별장 인근의 농장이었다. 그곳에서는 가까이 작은 호수가 보였고 주변에 자작나무와 포플러, 버드나무가 흐드러지게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다.

알렉세이는 이른 아침부터 관리인을 시켜 길게 자란 잔디를 말끔히 정리해 두었다. 잔디밭 한가운데는 새하얀 탁자보가 뒤덮인 식탁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 갓 구어 기름을 뺀 통닭과 소금을 뿌려 구운 돼지고기, 약간의 빵, 그리고 간장에 절인 달걀이 법랑식기에 담겨있었다. 그 옆으로 훈제 연어구이와 철갑상어 알, 새우조림, 사과사라다가 먹음직스럽게 놓여있었다. 특히 둥근 손잡이가 달린 유리병에 담긴 러시아산 딸기 주스는 핏빛으로 우리의 식욕을 돋웠다.

알렉세이는 기름진 이곳 음식에 식상한 우리의 취향을 파악했는지 기름기가 없는 음식들로 식단을 차렸다.

우리는 잔디밭을 오가며 약간의 담소를 나눈 뒤 식탁에 앉았다.

부총영사인 나 선배와 빅또르 김이 얼굴을 마주하고 앉았으며 나는 알렉세이와 마주앉았다. 그 옆에는 낯선 사내가 앉아 있었다. 알렉세이는 그를 자신과 같이 일하는 꼴레뜨네프라고 소개했다. 까무잡잡한 그의 얼굴은 비쩍 말랐고 곱슬곱슬한 칠흑의 머릿결이 흑인을 연상시켰다. 얄팍한 입술 사이로 늑대 같은 이빨이 번득였다. 그는 죽음 앞에서도 초연한 사람처럼 잘 길들여진 잔인함이 얼굴에 배어있었다. 검은 눈동자는 알렉세이와 우리의 눈빛을 번갈아 가며 읽곤 했다.

알렉세이는 흰 바지에 같은 계통의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는 셔츠의 단추를 다 채우지 않아 가슴에 돋은 털이 옷깃사이로 내다보였다. 하지만 소매 깃은 손톱만큼의 틈도 없이 달라붙게 단추를 채우고 있었다. 파랗게 속살이 드러나 보일 만큼 매끈하게 면도한 턱을 만지며 연신 말보르 담배를 입에 물었다.

알렉세이는 가벼운 얘기가 끝날 때쯤 호랑이 뼈를 우려서 담았다는 다홍빛 술을 내놓고 잔을 채우게 했다. 그럴 때마다 식탁 주변에 서 있던 여성들이 우리의 시중을 들었다.

그는 술잔이 채워지자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말을 했다.

러시아 속담에 내 집에 찾아온 손님 대접을 잘해야 하는 일이 잘 풀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문을 연 뒤 지루할 만큼 이날 모임에 대한 의미를 설명했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이나, 또 나 선배가 자신들과 동석한 것이, 먼 훗날 좋은 결실을 얻기 위한 첫발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방문이 양국의 관계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그는 애써 설명했다. 끝으로 그는 채린이 곧바로 돌아올 것을 확신한다는 말을 수차 되풀이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독수리 문양이 금장으로 새겨진 그의 버클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내 팔이 얼얼해 졌을 때쯤에야 말을 맺었다.

다음은 나 선배의 차례였다. 그는 이곳의 문화에 익숙한 듯 술잔을 배 위에 대고 한참동안 답례를 했다. 나는 그가 답례를 하는 동안 다홍빛 잔을 내려다보며 빨리 답례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나 선배는 내가 잔을 다른 손으로 바꾸어 쥐는 모습을 보고서야 서둘러 말을 맺었다.

곧이어 알렉세이의 건배제의가 있었고 한 차례 술잔이 비워졌다. 쟁반에 칼과 포크 부딪치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렸다. 나는 훈제 연어고기의 부드러움을 즐겼다. 그러나 그것도 너무 짠 것이 흠이었다.

알렉세이는 다홍색 술이 그의 창백한 얼굴로 스며든 것처럼 조금씩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눈가에는 여전히 회갈색의 차가운 눈동자가 만들어 내는 메마른 미소가 빛났다.

저작권자 © 디트NEWS24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