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복도를 말없이 거닐고 있을 때 따냐의 집과 인접한 곳의 문이 열렸다. 그 속에서는 앞가슴이 풍만한 여자가 흥미롭다는 듯이 나를 내다 봤다. 헝클어진 머리와 윤기 없는 피부, 싸구려 화장품 색깔이 배인 얼굴이 성큼 눈앞에 다가섰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얼굴에는 마치 누군가가 화약을 문지른 듯 까만 점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따냐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는데 없군요.”

실례지만 누구신데요?”

따냐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며칠간 못 봐서......”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여기 다녀가신 분이군요.”

그녀는 입술에 침을 바르며 싱긋이 웃었다.

따냐가 들어올 시간이 되긴 됐는데.”

그녀는 나를 아래위로 연신 훑어 봤다. 눈빛이 범상치 않았다. 자신을 따냐의 먼 친척이라고 소개한 그녀는 따냐가 돌아올 때까지 자신의 집에 들어와 기다려도 좋다며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는 가슴을 흔들며 가스레인지 위에 차 끊일 물을 올려놓고 돌아왔다.

여기 사시는 분 같지는 안은 데. 고려인?”

한국에서 왔습니다. 이곳에 일이 있어서.”

맞아요. 따냐에게 들은 기억이 납니다. 먼 곳에서 오신 손님을 이런 누추한 곳에 모시게 되어서 송구스럽군요.”

그녀는 입버릇처럼 말을 뱉었다. 겉으로는 전혀 송구스런 표정이 녹아 있지 않으면서 관례적으로 하는 말처럼 들렸다.

한국에 대해서는 아십니까?”

그럼요. 따냐에게 종종 듣기도 했고.”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한국에 대해 수다를 떨었다. 자신은 지난 88년 서울 올림픽 이 전까지는 한국이 보잘 것 없는 작은 나라로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북한 정도의 경제수준을 지닌 나라로 인식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올림픽이 끝나고 난 뒤 하나 둘 한국에 대한 얘기를 들었지만 이제는 상당히 많이 알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서울 올림픽 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고려인들은 사실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았어요. 식량 배급을 위해 줄을 설 때면 이곳 사람들이 괜히 고려인들에게 시비를 걸어 두들겨 패거나 아니면 아예 줄의 맨 끝으로 끌어내기 일쑤였지요. 따냐가 한국말을 배운다고 했을 때도 나는 이상하게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어요. 대단한 나라지요.”

그녀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뿐만 아니라 연해주 전체에서 한국의 명성이 대단하다고 덧붙였다. 시내 중심가의 점포마다 한국산 물품들이 즐비한 것도 이런 맥락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연신 엄지손가락을 펴 보이며 한국이 최고라고 입버릇처럼 중얼거렸다.

한국에 비하면 러시아는 너무나 가난합니다. 늘 부족함 속에서 사는 것이 습관이 됐지요. 저는 한국에 가본 적은 없지만 직장에서 얘기를 들었는데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 가운데 하나라더군요. 일본만큼이나 발전했다고......”

찻잔을 내 앞에 내밀면서도 그녀는 혼잣말처럼 한국에 대한 얘기를 계속했다. 나는 그녀가 말을 내뱉을 때마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문밖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얼마 전 부두에서 일하던 남편이 크레인 사고로......혼자가 됐지요.”

내가 그녀의 신세타령을 지루하게 듣고 있을 때 문밖에서 경쾌한 하이힐 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종종걸음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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