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129]
탈북자 [129]
  • 이광희
  • 승인 2019.03.04 09: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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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바롭스크에 갔다는 따냐가 왜 여기에 있겠습니까. 혹시 잘못 본 것은 아닐까요?”

야로슬라브는 내가 그녀를 보았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일단 핑크빛 스카프를 쓴 사람을 찾아봅시다.”

나는 홀 중앙 로비에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때 야로스라브가 등 뒤에서 내 옷깃을 당겼다. 그는 말없이 턱 끝으로 중앙 계단을 가리켰다. 나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중앙계단에는 중년의 부인들과 노동자풍의 사내들 그리고 아이들이 한 덩어리가 된 채 계단을 메우고 있었다. 나는 다시 그를 쳐다봤다.

방금 핑크빛 스카프를 쓴 아가씨가 올라가는 것을 봤어요. 좀 전에 봤던 그 사람.”

나는 중앙계단을 향해 급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의도적으로 하바롭스크에 간 것처럼 나를 따돌렸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꼬리를 들었다. 사람들이 쏟아져 내리는 계단을 거슬러 오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지느러미를 흔들며 역류하는 연어처럼 몸부림을 치며 계단을 올랐다. 2층에도 사람들이 많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까치발을 들고 주변을 둘러봤다.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혹시 이곳에 쇼핑을 위해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진열대 구석구석을 뒤졌다. 우리가 여러 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백화점을 둘러보고 있을 때 맨 끝방으로 통하는 통로에서 따냐와 흡사해 보이는 여자가 지나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밀려오는 사람들의 틈을 헤집고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우리가 그녀가 섰던 통로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그녀가 그곳을 벗어난 뒤였다. 우리는 통로를 따라 3층으로 급히 올라갔다. 가쁜 호흡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어디로 간 거야.’

우리는 3층을 둘러보며 그녀가 있을만한 곳을 기웃거렸다. 가벼운 가재도구를 파는 코너와 금은방, 잡화류 상점, 구둣가게, 가죽 제품 판매코너.......

우리가 거의 모든 구석을 둘러봤을 때쯤 그녀가 중앙계단 부근에서 물건을 흥정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그곳 종업원과 가벼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종업원은 감자를 담은 부대자루같이 울퉁불퉁한 곡선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몸을 구부리고 공처럼 부풀어 오른 볼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게으르게 쓸어 넘겼다.

우리는 눈앞에 있는 먹이를 노려보며 다가가는 사마귀처럼 살금살금 그녀가 서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한참동안 흥정을 하다 우리가 가까이 다가갔을 때쯤 구부렸던 허리를 폈다. 옆모습이 따냐와 흡사했다. 갈색머리칼과 좁은 어깨, 오뚝한 콧날, 핑크빛 스카프사이로 비어져 나온 긴 목. 그녀가 분명했다.

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두텁게 앞을 가로막은 자리에서 그녀를 불렀다.

따냐

그러자 그녀는 잠시 멈칫거리는 듯 하다 고개를 돌리고 머쓱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따냐가 아니었다.

 

따냐의 집은 블라디보스토크 변두리에 있는 낡고 퇴색된 2층 건물의 공동주택이었다. 그녀의 방은 비좁은 복도를 따라 들어간 뒤에야 나타났다. 집은 해묵은 나무문이 굳게 잠겨있었고 문지방 옆에는 부서진 벽돌조각들이 굴러다녔다.

며칠 전 이곳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혼자 시간을 보내기에는 안성맞춤이란 생각을 했던 것이 허상이었음을 깨달았다. 균열이간 회백색 벽면은 아이들이 그린 그림들로 가득했다. 도무지 알아볼 수 없는 그런 그림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남자나 여자 신체의 부분을 지극히 단조로운 선으로 조잡하게 그린 그림들은 그것이 무엇을 그렸는지 단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돼지털같이 숭숭하게 돋은 체모가 유달리 적나라하게 낙서된 것이 특이했다. 손잡이가 반들거리는 문짝은 문틈으로 황소바람이 지나고도 남을 것같이 엉성했다. 안에서 나는 숨소리조차도 새어나올 것 같았다.

나는 노크를 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뚜벅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복도를 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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