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126]
탈북자 [126]
  • 이광희
  • 승인 2019.02.25 09: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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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없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전화가 끊겼다. 나는 그녀가 수화기를 놓쳤다고 생각하며 그녀를 계속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어떤 잡음도 들리지 않았다.

여보세요 따냐?”

나는 수화기를 잡고 목청을 돋우었지만 반응이 없었다. 공허함만이 귓전에 맴돌았다. 전화기를 두들겨 봤지만 여전히 무반응이었다. 수화기를 침대위에 내동댕이쳤다.

허탈감이 빈 가슴 속으로 휘몰아 쳤다. 둔중한 몽둥이에 뒤통수를 있는 힘을 다해 얻어맞은 것처럼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 때 야로슬라브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전화를 받고 호들갑을 떠는 내 모습에 놀라 의아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미치광이처럼 방안을 뛰어다녔다.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곤죽이 된 밀가루 반죽이 밑에서 달아오르는 열기를 이기지 못해 풀쑥 솟구치듯 가슴이 달아올랐다. 나는 허겁지겁 옷을 챙겨 입고 신발을 찾았다. 가슴이 문풍지같이 떨렸다. 맥박이 빨라졌고 얼굴로 피가 역류하고 있음을 느꼈다.

무슨 일입니까?”

야로슬라브는 내 행동이 심상찮다는 것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그는 내가 정신없이 부산떠는 모습을 보며 드디어 미쳤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채린을 잃어버린 뒤 방황하다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 미친 것이 확실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는 말없이 근육질의 양팔로 나를 부둥켜안았다. 내 가슴이 숨 가쁘게 벌떡거리는 것을 느낀 그는 더욱 거센 힘으로 나를 끌어안고 진정시키려했다. 그의 노력은 필사적이었다. 내가 울부짖으며 그의 팔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가 얼마나 꼭 나를 감싸 안았는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정신과 의사처럼 눈동자의 흔들림으로 내가 얼마나 미쳐버렸는지를 가늠하고 있는 것 같았다. 회갈색의 눈빛이 내 눈자위를 휘감으며 속으로 밀려들었다.

나는 온 몸의 힘이 쭉 빠지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른한 현기증이 희멀건 박제만을 남긴 채 온몸의 기력을 송두리 채 앗아갔다. 허리를 세우고 앉아있을 힘조차 없었다. 머리통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목이 길게 늘어졌다. 내 몸이 반쯤은 호텔 바닥으로 기울고 있었다. 낡은 돌담이 힘없이 무너지듯 나는 그렇게 꼬꾸라졌다.

왜 이러세요?”

야로슬라브는 내 뺨을 부비며 일으켜 세우려고 애썼다. 그래도 몸을 가누지 못하자 그는 나를 덥석 끌어안아 침대에 누였다. 나는 그가 하는 대로 드러누워 천장을 멀뚱히 올려다봤다. 그제야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숨 가쁘게 차오르던 맥박도 제자리를 잡았고 거칠게 토했던 호흡도 안정을 찾았다. 몽롱한 현기증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전화를 받은 겁니까?”

따냐.”

따냐라니. 극동대 교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총영사관에 전화를 걸어주세요. 그녀를 찾아야 합니다.”

야로슬라브는 내가 허공에 내뱉는 소리를 들으며 다급히 영사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야로슬라브는 내게 쉴 것을 종용했지만 그렇게 있을 수가 없었다. 따냐가 채린의 실종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보채는 아이처럼 야로슬라브를 자리에서 일으키고 빅또르 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그 역시 나만큼 숨 가쁘게 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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