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 스토리] 변해섭 대전시선관위 지도과장

변해섭 대전시선거관리위원회 지도과장은 올해 부이사관으로 승진했다. 35년간의 공직 생활이 빛을 발하고 있다.
변해섭 대전시선거관리위원회 지도과장은 올해 부이사관으로 승진했다. 35년간의 공직 생활이 빛을 발하고 있다.

새해 벽두부터 대전시선거관리위원회에는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사무실 한켠에선 조합장 선거 관리 준비로 여념이 없었지만 희소식은 빠르게 확산됐다. 그리고 본인에게 전달됐다. 주인공은 변해섭(58) 대전시선거관리위원회 지도과장이다.

변 과장에게 전달된 희소식은 바로 3급 부이사관에 승진됐다는 것. 그의 얘기를 빌리자면 전국 120만 공무원 가운데 불과 1500명 밖에 안되는 부이사관급 이상 고위 공무원 반열에 올라선 것이다. 비록 예견됐던 것이라도 실제 승진 발표가 나자 변 과장은 만감이 교차했다. 1984년 4월 10일 임용된 뒤 35년간의 공무원 생활 끝에 3급 자리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지역 사회에서 변 과장의 네임벨류는 대단하다. 공직 생활 중 대부분 대전 선관위에서 선거 관리를 해왔던 터라 웬만한 선거 출마자는 물론, 정치인들은 그를 모를래야 모를수가 없다. 지방자치 시작 이후 각종 선거를 변 과장이 직접 관리했다고 봐도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 과장 자신은 부이사관 승진이 발표된 뒤 여러가지 생각이 중첩됐다. 공직 생활을 하면서 최고의 자리라 할 수 있을 부이사관에 올라 좋기도 했지만 반대로 그동안의 역경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진 것이다. 그만큼 그는 어려서부터 평범한 삶을 살지 못했다. 아니 평범한 삶을 살지 않았다.

그는 1961년 지금은 대청호로 수몰된 대덕군 신탄진읍 갈전리 299번지에서 태어났다. 2남 2녀 중 장남. 부친이 사업을 정리한 뒤부터 거기서 살았다. 당시 웬만한 시골의 풍경이 그렇듯 변 과장도 가정형편이 녹록치 않아 고구마나 감자를 먹으며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다고 한다. 초등학교인 국민학교 다닐 적에는 80명 다니는 반에서 3등을 할 정도로 공부에 소질이 있었지만 가정 형편으로 중학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길은 가출이었다. 가난이 싫었던 그는 1974년 2월 초등학교 졸업식 이틀 후 가출을 감행(?)했다. 돈을 벌고자 혈혈단신으로 집을 나온 그는 성모병원 근처에 있는 카센터로 무작정 들어갔다. 거기서 3개월 동안 기거하며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다. 그러다 3개월 만에 짐을 싸 집으로 들어갔다가 또 가출했다. 이번에는 주유소에서 기름을 배달하는 일을 했는데 작은 키가 문제였다. 자전거로 기름을 배달하는 일이 힘들어 한 달 만에 그만두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지인으로부터 소개를 받고 지금의 보문고 주변 모자공장에서 일을 하게 된다. 모자공장에서 일하면서 그는 다리미질에서부터 고속 미싱질까지 나름의 기술을 배웠다. 1975년부터 3년간 모자공장에서 먹고 자는 생활을 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밤 늦은 시간까지 열심히 일했다. 이때 그의 인생에 첫 번째 터닝 포인트가 찾아온다. 바로 야학이다.

초등학교 친구의 소개로 신도극장 뒤에 있는 야학을 다니게 됐다. 처음에는 모자공장 사장의 반대로 일을 그만뒀다. 업무 시간과 겹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공장장의 배려로 다시 모자공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모자를 배달하면서 허리를 다쳐 디스크 수술까지 했지만 꾸준히 야학을 다니며 주경야독한 결과 검정고시에 합격해 중학교 졸업자격을 얻게 됐다.

"가난이 싫었어요. 그래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대전 시내로 나와 닥치는 대로 일을 했죠. 그러다 모자공장을 다니게 됐고 야학도 알게 됐어요. 지금 생각하면 야학을 다니지 않았다면 제 인생이 어떻게 됐을까 싶어요. 야학을 소개해 준 친구가 고맙죠."

변 과장은 이 당시 자신에게 야학을 소개시켜준 초등 친구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 친구는 10년 전 사망했다고 한다.

검정고시로 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다음 도전을 이어갔다. 바로 고등학교 진학. 고입 검정고시를 고민하다 수업료를 내지 않고 기숙사(매월 만원 정도)도 저렴한 동아공고에 입학한다. 이때가 그의 나이 20살, 1980년도다. 또래 아이들보다 3년 늦게 고등학교 입학했다. 3살 어린 여동생과 고등학교를 같이 입학했다.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 중동 붐이 불면서 대기업에서는 중동에 파견할 신입직원을 뽑았고 서울까지 면접을 보러 다녀왔지만 허리디스크 수술로 인해 탈락했다. 이때 중동에는 가질 못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두 번째 인생의 변곡점을 맞이하게 된다.

허리 수술로 인해 몸을 쓰는 직업은 어렵다고 판단해 공부를 하기로 작정한다. 곧바로 고시학원에 등록한 뒤 공부에 매진한다. 학원비 때문에 점퍼공장에 취직하기도 했다. 그렇게 한 번에 체신부 공무원에 합격했다. 합격한 뒤에도 정식 발령 전 날까지 모자공장에 다녔을 정도로 그는 악착같은 성격의 소유자다. 파란만장한 세월을 딛고 드디어 공무원으로 임용된 게 1984년 4월 10일이다.

첫 부임지인 충남 아산우체국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한 그는 1년 뒤 대전우체국으로 이동해 대전산업대(전자계산과) 야간을 다녔다. 과대표와 학생회장까지 맡을 정도로 성적과 인간관계가 모두 좋았다. 1990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고민에 빠졌다. 체신부는 보험과 예금 판매 실적을 따져야 하다 보니 신경이 쓰였다. 때마침 선거관리위원회가 조직을 확대하고 있었고 이를 기회라고 생각한 그는 선관위로 전직을 했다. 1990년 3월 충남 아산선관위에서 근무하다 1년만에 대전으로 발령된 그는 지금까지 대전에서 근무하며 승승장구해 부이사관까지 거머쥐었다.

"부족한 저에게 공무원 120만 명 가운데 1500명 밖에 안되는 부이사관 이상 공무원 자리를 줬다는 것에 감사하고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진 기분입니다. 조직이 나에게 해준 만큼 후배들에게 족적을 남겨야 한다는 마음으로 남은 공직생활에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앞서 얘기했듯 가난이 싫었던 변 과장은 스스로 벗어나기 위해 여러 시도를 했다. 주유소부터 모자공장, 인쇄소, 제과점, 점퍼공장 등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살았다. 비록 작은 체구로 무거운 짐을 싣고 나르다 허리를 다쳐 현재도 허리가 불편할 때가 있지만 그의 인생에 후회는 없다고 한다. 어려운 집안 환경이었지만 동생들 모두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고 본인도 네 식구의 가장으로서 성공한 모습을 갖췄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학력 콤플렉스가 있었다. 보통의 성인들이 어느 학교를 졸업하고, 어떻게 성장했는지 자랑하듯 늘어놓을 때면 그는 야학을 배우고 검정고시로 중학교 졸업장을 딴 사실에 대해 위축되기도 했다. 사무관으로 승진하기 위해서는 시험을 봐야 하는데 시험공부가 자신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니 인생이 달라졌다. ‘한 번 해보자’고 마음먹고 사무관 승진 시험 준비를 시작했고 결국 합격하는 기쁨을 맛봤다. 그 때부터 욕심이 생겼다. 5급이 되고 4급 서기관이 됐으며 3급 부이사관까지 거침없이 올라왔다. 비교적 늦은 시기에 사무관 시험을 본 게 후회스러울 정도였다고 한다. 스스로의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열심히 노력했고 그 결실은 승진으로 다가왔다.

변 과장은 유년시절 가출해 모자공장과 주유소 등지에서 기거하며 생활을 했다. 그 과정에서 친구의 소개로 접한 야학은 그의 인생을 바꾸게 되는 터닝포인트가 된다. 사진은 변 과장이 야학에 다닐적 모습.
변 과장은 유년시절 가출해 모자공장과 주유소 등지에서 기거하며 생활을 했다. 그 과정에서 친구의 소개로 접한 야학은 그의 인생을 바꾸게 되는 터닝포인트가 된다. 사진은 변 과장이 야학에 다닐적 모습.

35년간의 공무원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민선 자치로 지방선거가 처음 시행되던 1990년대 무렵이라고 한다. 1991년 지방의회 선거에 이어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치러지면서 선관위의 업무는 그야말로 마비가 될 정도였다. 당시에는 선거관리에 대한 의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불법이 횡행했고 마음이 여린 공무원들은 자살까지 할 정도였다고 변 과장은 회고했다.

변 과장은 현행 선거법이 수정 보완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현행 선거법이 시대적인 흐름을 예견하지 못하고 언제나 후속적인 조치로만 이어지면서 과연 선거법이 필요한지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되곤 한다. 그 중에는 공무원들의 선거 중립이나 선거연령 제한도 포함돼 있다. 공무원 노조를 중심으로 공무원의 정치적 의사표현도 존중돼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또 현행 만 19세인 선거연령을 18세로 낮춰야 한다는 의견은 벌써부터 제기돼 왔다.

"많은 국민들은 '선거가 없을 때 선관위는 뭐하냐'라며 묻는데 저는 '군대가 전쟁 안 났다고 놉니까'라고 되물어요. 선거가 없을 때에는 학생이나 일반인에게 민주주의 교육을 실시해 선거에 참여하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공무원들도 국민입니다. 정치적 의사표현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선거연령도 낮춰야 합니다. 금품 선거를 제외한 나머지 선거운동은 모두 풀어야 합니다."

허리 수술로 인해 군인이나 경찰의 꿈을 포기한 그는 3년 앞으로 다가온 퇴직을 앞으로 제 2의 인생을 준비할 요량이다. 충남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까지 노려볼 생각도 있다. 지인들이 함께 사업을 해보자는 제안도 해와 고민 중이다. 한 때 선거 출마도 고민했지만 지금은 출마 생각을 접고 편안하게 새로운 인생을 설계 중이다. 정말이지 행복한 고민에 빠진 변 과장이다. 그는 스스로 시련이 자신을 단련시켰다는 것을 인정한다. 사춘기인 10대 시절 나쁜 길로 빠지지 않고 누군가에 의해 제대로 된 길만을 걸어 온 것이 뿌듯할 때도 있다.

어려웠던 유년시절을 보내며 인생의 굴곡을 딛고 지금은 부모님과 동생들과 함께 즐거운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에 그는 항상 고마움을 느낀다고 한다. 그는 인생의 철칙이 있다. 사람이 재산이라는 생각으로 한번 만난 사람은 절대 적으로 만들지 않고 한번 맺은 인연은 끝까지 챙긴다. 신용과 약속을 중시하는 그답게 약속장소에 10분 전 도착이 필수다.

서글서글한 모습과 친근한 말투에 언제나 만나면 큰형 같은 변 과장이지만 사실 지역 선거판에서는 '암행어사'로 불린다. 그만큼 지역 정치권에서는 그의 프로정신이 인정받고 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라는 그의 성격은 때로는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적이 많은 건 아니다. 사람이 재산이라는 그의 철학 덕분인지 대체로 그를 바라보는 지역사회의 시선은 호의적이다. 그의 인생에 몇 차례 과도기가 있을 때마다 제대로 된 길로 이끌었던 것도 그가 그렇게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주변 사람들 덕이다.

"제가 만약 어려서부터 고생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살았다면 지금보다 못 살았을 것 같아요. 그만큼 시련이 절 단련시켰다고 생각해요. 그런 제 자신에게 항상 고마워요. 살아오면서 제가 하고자 했던 일은 다 된 거 같습니다."

그는 어릴 적 모자공장에서 배달하면서 배고플 때 중앙극장 앞 좌판에서 먹던 500원 어치 순대 맛을 잊을 수 없어 요즘도 그때를 생각하며 자주 가곤 한단다. 그의 소박한 삶의 단면을 보여주는 한 장의 사진과 같은 장면이다. 시골 촌놈의 인생 이모작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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