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열 법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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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 평화기념공원과 대만총통부가 있는 MRT 2호선(붉은색) 다이타이위엔역(台大醫院站) 네거리에서 대만총통부 남쪽 네거리인 MRT 2호선과 3호선 송산신점선(파랑색)이 교차하는 중정기념당역을 나서면 중정기념당이 있다.

중정은 국민당 주석이자 대만 초대총통이었던 장제스(蔣介石: 1887~1975)의 본명이고, 국립중정기념당은 국립고궁박물관, 국립국부기념관, 용산사와 함께 ‘타이베이 4대 관광 코스’로 꼽히고 있다.

흰색 바탕에 청색 기와를 얹은 30m 높이의 우뚝 솟은 정문에 ‘자유 광장(自由廣場)’이라는 현판은 중국인들이 ‘서성(書聖)’으로 존경하는 동진의 왕희지(王羲之: 307~365)의 글자를 집자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우리의 서원이나 향교 등의 입구에 액을 막기 위하여 세운 홍살문처럼 마을 입구나 큰 길 입구에 세우는 것을 패루(牌樓)라고 하는데, 전통적으로 한족은 흰색 바탕이고 만주족은 붉은색으로 세운다. 한족의 대표적인 패루는 국립고궁박물관, 국부기념관, 북경의 명13릉 등에서 볼 수 있고, 만주족인 청의 패루는 베트남 호이안의 광조회관, 북경의 이화원 등에서 볼 수 있다.

이렇게 패루 하나만으로도 한족과 만주족의 민족적 갈등이 얼마나 치열한지 잘 알게 해주는데, 한족 이외에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중국대륙에 조금만 민주화 정신이 스며든다면 중국의 붕괴는 순식간일 것이라는 예감을 갖게 한다(광조회관에 대하여는 2018. 8. 20. 호이안(1) 참조).

1. 중정기념관 패루
1. 중정기념관 패루
1-1. 광장 전경
1-1. 광장 전경

중정기념관은 입장료가 무료인데, 타이베이뿐만 아니라 대만 전체의 패루 중 가장 크다는 중정기념관의 정문에 들어서면 좌우에 자금성의 황궁을 모방한 황금색 지붕을 한 건물이 하나씩 있다. 오른쪽 건물이 국립극장(國立戲劇院)이고, 왼편이 국립콘서트 홀(音樂堂)이다.

장개석 사후인 1980년 4월 25만㎡(약7만 5000평)의 대지에 조성한 중정기념관은 정문 이외에 국립극장과 음악당 출입문은 물론 중정기념당 본관 1층에서도 드나들 수 있고, 광장은 유럽의 여느 광장처럼 판석을 깔았다.

특히 중정기념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양편에 아름답게 가꾼 화단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the Sound of Music)’으로 유명한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쉔브론 궁전의 정원을 연상하게 하며, 광장은 정부의 행사나 시민단체의 행사장으로 이용되고. 매일 아침 시민들이 전통 태극무 등을 하는 운동장이 되고 있다(광장 판석의 유래는 2017.01.06. 로마 포로로마노, 비엔나 쉔브론 궁전에 관하여는 2017. 3. 24. 쉔브론 궁전 참조),

광장 가장 안쪽에 70m 높이의 흰색 화강암으로 세운 중정기념당은 광장 양편의 황금색 건물인 국립극장이나 음악당과 달리 흰색 외벽에 청색 기와로 건축한 8각형 건물인데, 이것은 자유와 평등을 상징한다고 한다.

중정기념당으로 올라가는 89개의 계단은 장개석의 서거당시의 나이를 상징하며, 기념당의 넓은 홀 한 가운데에 장개석 총통이 통일하지 못한 대륙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모습의 동상이 있다. 6.3m의 동상은 25톤의 청동으로 제조했다고 하는데, 동상 앞의 홀에서는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매시 정각에 제복을 입은 근위병 5~6명이 15분가량 교대식을 벌인다.
 

2. 음악당(우)
2. 음악당(우)
2-1. 국립극장(좌)
2-1. 국립극장(좌)

근위병교대식은 병사들의 절도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취지이겠지만, 경직된 모습은 관객에게 즐거움이나 호기심보다 대만 사회가 아직까지 ‘통제된 사회’라는 생각을 더욱 강하게 해줄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의미로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지 알 수 없는 보기 역겨운 근위병교대식은 신해혁명으로 청조를 멸망시킨 뒤 최초로 중화민국을 세운 초대 통령 쑨원(孫文)을 모신 국부기념관에서도 매시 정각에 진행하고 있으나, 관광객들은 중정기념관에서 장개석의 업적보다 15분 남짓한 근위병교대식을 ‘쇼’처럼 즐긴 뒤 썰물 빠지듯이 사라진다.

기념관의 2층은 관리사무실이고, 계단이나 승강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면 장개석 관련 전시실이다. 전시실 한 가운데에는 장개석이 생전에 타고 다니던 롤스로이스 승용차가 전시되어 있고, 주변에는 그의 업적을 보여주는 많은 사진과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장개석이 집무실에 앉아 있는 모습을 밀랍으로 재현한 것인데, 그가 앉아 있는 책상서랍이 앞쪽에 만들어지고 의자 하나가 놓여있다.

이곳이 그의 세 번째 부인인 송미령의 자리였다고 하니, 그의 위상이 조금은 어색하게 생각되기도 했다. 특별전시실은 연간 100여회의 일반 문화예술 전시회를 갖는 공간으로 이용되며, 그밖에 기념품판매점과 카페, 레스토랑 등이 있다.

3. 중정기념관
3. 중정기념관
3-1.기념관에서 바라본 광장 전경
3-1.기념관에서 바라본 광장 전경
4. 장개석 동상
4. 장개석 동상
4-1. 근위병교대식
4-1. 근위병교대식

1887년 중국 남부인 저장 성(浙江省)에서 비교적 유복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장개석은 19세 되던 1906년 바오딩(保定) 군관학교에 입학했으나, 1909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군 육사에서 훈련을 받던 장개석은 조국에서 이민족인 만주족을 몰아낼 것을 다짐했는데, 1911년 5월 신해혁명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귀국하여 쑨원의 광둥 신정부에 들어갔다.

쑨원은 장개석을 광저우에 세운 황푸군관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임명했는데, 1925년 쑨원이 죽은 뒤 그의 후계자가 되었다. 장개석은 군벌들을 제압하는 혁명군총사령관으로서 북벌을 개시하여 1928년 베이징 입성으로 북벌을 끝내고, 그해 난징(南京)에 국민당정부를 세웠다. 그러나 총통으로서 그의 정책은 대부분 탁상공론에 그쳤고, 또 군벌들은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아서 사회는 크게 혼란스러웠다. 더욱이 농촌으로 퇴각한 공산당은 그들의 정부와 군대를 조직하여 국민당정부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5. 로비 전시실
5. 장개석이 생전에 타고 다니던 롤스로이스 승용차
5-1. 전시물들
5-1. 전시물들
5-2. 장개석 흉상
5-2. 장개석 흉상
6. 장개석 집무실
6. 장개석 집무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장개석이 외적인 일본군 격퇴와 국내의 공산당 척결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놓고 고민하게 되었는데, 이때 장학량(張學良: 1898~2001)이 우선 국공합작을 요구하며 장개석을 가둔 시안(西安) 사건으로 그는 국공합작하여 일본을 물리치기로 작심했다.

하지만, 장개석은 자신을 연금시켰던 장학량을 체포하여 1946년부터 2차 국공내전이 재개되어 공산당에게 대륙을 빼앗기고 대만으로 패주할 때에도 그들 호송하여 죽을 때까지 연금시켰다. 대륙을 차지한 중공은 1972년 미국과 관계개선을 이루고, 1979년 마침내 미국과 국교를 수립하면서 대만정부와는 외교관계를 끊었다(자유중국 단교에 관하여는 2019.01.07. 2,28. 평화기념공원 참조).

1949년 장개석의 국민당정부가 대만으로 피난한 뒤 장개석은 일제가 대만을 통치할 때 원예시험장으로 사용하던 곳을 총통관저로 삼았는데, 사림관저(士林官邸)라고 하는 총통관저는 장개석 사후 1996년 미망인 송미령 여사가 미국으로 건너갈 때까지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은 비밀의 공간이었다가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사림관저는 MRT 단수이선(붉은색) 스린역(士林站) 하차하여 1번 출구로 나와 약 8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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