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용 칼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극단적인 정치적 편견을 제외한다면, 신참 공무원의 경솔한 폭로로 빚어진 불상사로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정의로운 사무관이 참아낼 수 없는 부도덕한 정권의 민낯을 드러낸 사건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후자의 입장이다. 그동안 양심적인 공무원들이 겪어왔을 갈등과 고통이 이른바 민주 정권에서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사건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초에 공직자들에게 주문했던 ‘영혼 있는 공무원’은 바로 신 씨 같은 공무원이다. “공직자는 국민을 위한 봉사자이지 정권에 충성하는 사람이 아니다”는 게 문 대통령의 말이었다. 신 씨는 대통령의 말을 그대로 따른 공무원이다. 청와대가 재정적 이유가 아니라 정치적 이유 때문에 적자 국채를 발행하려 기획재정부를 압박했고, 민간 기업인 KT&G 사장을 교체하려 했다는 사실을 국민들은 이번 일로 알게 됐다. 

국가도 개인도 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빌려서라도 채워놔야 된다. 돈이 충분히 있어서 빌릴 필요가 없는 데도 부채를 낸다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순수한 국가재정 운용 측면이 아니라, 부채를 전임 정권의 몫으로 떠넘기면서 새 정권이 쓸 돈을 최대한 확보해 놓자는 것이 새 정권 청와대의 뜻이었다는 게 신 씨의 폭로 내용이다. 김동연 당시 부총리(기재부장관)는 청와대의 입장을 ‘정무적 판단’으로 표현했다. 

‘영혼있는 공무원’이면 반발했을 청와대 국채 요구

양심적인 공무원이면 이런 ‘정무적 판단의 정책’에 찬성하기 어렵다. 신 씨의 주장을 정리해보면 당시 기재부 공무원들은 하나같이 반대였다. 신 씨 혼자 반대한 게 아니었다. 김 부총리는 청와대 요구 때문에 고민했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기재부는 결국 국채를 발행하지 않았다. 기재부 직원들이 부총리를 설득하고 부총리가 청와대를 이해시킨 결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부총리와 청와대의 언쟁도 있었던 것 같다.

기재부 직원들이 청와대의 요구를 따랐다면, 부담하지 않아도 될 1~2000억 정도의 이자를 물어야 한다. 물론 그 돈은 국민 호주머니에서 나온다. 국가와 국민에겐 손해가 나는 방법이라도 정권에 이익이면 밀어붙이는 게 ‘정치’다. 이런 정치를 막아내고 국세 2000억을 절약할 수 있었던 건 기재부 공무원들의 공이다. 신참 사무관이었던 신참 신 씨의 공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다. 

이런 공무원들이 있어서 그래도 나라가 돌아간다. 대통령과 청와대에 묻고 싶다. 문 대통령이 주문했던 ‘영혼 있는 공무원’이 이런 공무원들 아니었나? 이들이야말로 정권에 충성하지 않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공직자들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대통령이 요구했던 ‘영혼 있는 공무원’과 ‘정권에 충성하지 않는 공무원’이란 도대체 어떤 공무원인가? 우리 정권에만 충성하고 저쪽에는 충성하지 말라는 말이었나?

신 씨는 자신의 ‘공무원의 영혼’을 솔직하게 드러낸 죄로 정부로부터 고발되고 압박받는 처지가 되면서 자살까지 고민할 상황에 몰렸다. 비겁하게 눈 한번 질끈 감고 넘어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게 죄고, 영혼 있는 공무원이 되어 달라는 대통령 말을 그대로 믿은 게 죄다. 정부는 대통령의 말과는 달리 ‘영혼 없는 공무원’을 요구하고 있다. 이전 박근혜 정부 때의 공무원들에겐 ‘영혼 있던 공무원들’을 찬양하더니 자신이 권력을 잡은 뒤엔 박근혜 정부와 똑같이 하고 있다.

말을 잘못했다가는 영장도 없이도 자기 휴대폰이 청와대의 ‘포렌식 검증’을 받아야 하는 게 대한민국 공직자다. 본인 동의를 얻어 이뤄지는 것이라고 하지만 공무원이 최고 권부 청와대의 요구를 거부하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강압수사나 다름없다. 불법적 포렌식 수사의 실질적 목적이 정권에 대한 불온성 감찰에 있다는 점은 불문가지다. ‘사람’과 ‘인권’을 외치면서 ‘공무원 영혼’은 강제 압수하는 정권 아닌가?

나라 돈을 만지는 공직자들은 정권의 비리와 부패를 누구보다 많이 알게 돼 있다. 그러나 못 본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이번 사건은 또 한번 보여주고 있다. 그래도 ‘정의’와 ‘인권’을 내세워 집권한 정부에서조차 이런 일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 청와대 민간사찰 의혹과 신 사무관 사건은 국민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다.

‘내 편만 정의로운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

대통령은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정의로운 나라’를 언급한다. 대통령이 말하는 정의로운 나라는 도대체 어떤 나라인가? 국가와 국민에겐 죄가 없는 데도 정권에 밉보이면 쫓겨나고 고발되고 감옥 보내는 ‘정의로운 나라’라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 정부가 그런 정부 아닌가? 그동안 대한민국 정부는 애초 정의로운 정부가 아니었다. 그래서 정권을 바꾸고 또 바꾸면서, 이젠 그 점에선 걱정을 놔도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국민들이 선택한 정권이 문재인 정권 아닌가?

대통령이 말하는 ‘정의’가 진정이라면 신 씨 같은 공무원이 극단의 상황으로 내몰리는 일은 없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가? 혹시 대통령이 말하는 정의가 어느 한 쪽만을 위한 정의여서 생기는 일은 아닌가? 내편은 무조건 정의요, 내편이 아니면 불의라는 ‘정의론’이라면 ‘내 남편(전두환)은 민주주의 아버지’라는 이순자 씨의 궤변과 얼마나 다른 것인가?

여권 일각에선 ‘돈을 벌기 위한 베팅’이라거나 ‘꼴뚜기가 뛰니까 망둥이가 뛴다’며 신 씨를 깍아내린다. 똑같은 일이 이전 정권에서 벌어졌다면 신 씨를 영웅으로 떠받들 사람들이다. 이전 정권에선 그 반대 현상이 벌어졌다. ‘내 편에게만 정의로운 사회’는 반쪽만큼이라도 정의로운 사회가 결코 아니다. 한쪽이 다른 한쪽과 대립하고 싸우면서 망가지는 사회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런 나라가 되어 있다. 지금 경제가 어려운 것 사실이나, 미래를 내다보면 이 문제가 더 큰 걱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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