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은 가득이심리상담센터 대표
박경은 가득이심리상담센터 대표

그의 어린 시절과 삶의 일부분을 그의 언어로 담아본다.
 [‘네가 남자였다면 우리 집은 3남 3녀였을텐데.’
  지금도 어렴풋이 생각나는 말이다. 나는 전남 해남 ‘용동’이란 마을에서 2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우리 형제들의 생년월일은 누구하나 제대로 된 사람이 없고, 모두 출생보다 2년이 늦게 신고 되어있다. 4살 되던 해, 광주로 이사 왔으나 넉넉지 않는 살림 탓에 어머니는 막노동을 하셨고 아버지는 군대에 계셨을 때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과 함께 즐거웠던 기억보다는 바로 위의 연년생 언니와 둘이서 놀았던 기억이 많다. 다른 형제들하고는 나이 차이가 많아 모두 일찍부터 일터로 나갔기 때문이다. 이사를 자주 하다보니 친구와 놀았던 기억도 별로 없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다시 이사하게 된 날이 광주 5·18 사건이 터지는 날이었다. 시내 나가면 절대 안 된다고 들었지만, 철없는 나와 언니는 둘이서 시내 구경을 나갔다. 결국 최류탄을 맞고 신발을 잃어버린 채, 눈도 뜨지 못한 상태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날 옥상에서 바라봤던 총알의 불빛은 지금도 생생하다.
  아버지는 시멘트 회사에 다니셨는데 아침 일찍 출근해서 잔업까지 하고 늦게 퇴근하셨다. 아버지는 잔업 때마다 받는 ‘보름달 빵’을 드시지 않고 집으로 가져왔다. 그것이 지금까지 내가 느끼는 ‘아빠의 사랑’이다. 어쩌다 버스를 탈 기회가 되면 나는 터미널에서 그 빵을 사먹곤 한다. 어릴 적 아버지는 매우 엄하고 말씀이 거의 없으셨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언니랑 싸웠을 때, 어머니에게 소리치던 기억 정도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지금도 싸움과 갈등을 싫어한다. 아들과 딸이 집에서 다투기라도 하면 어떻게 중재해야 할지 몰라 그때의 아버지처럼 소리를 지르곤 했다.
  어린 시절 부모와의 대화가 많이 부족했다. 아버지는 연로하시면서 성격이 많이 부드러워졌지만 당시엔 매우 과묵하셨다. 어머니는 늘 생활고로 바빴던 때문이지 따뜻한 이미지로 크게 자리하고 있지는 않다. 지금의 나 역시 아이들에게 하는 무의식중의 행동이나 말투가 그렇게 따뜻한 모습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또한 자녀에게 사랑을 주는 방법도 늘 서툴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청소년 시기에 나는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하고 행동했다. 부모를 비롯하여 누군가와 생각과 감정을 나누는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지금도 어떤 일을 결정함에 있어서 다른 사람과 의논하는 것이 매우 서투르다.
  그러나 나의 내면에는 사랑을 갈망하는 어린아이가 늘 자리하고 있었다. 20대 초에 서울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하자 아버지는 ‘너에게 착하고 좋은 말만 해주는 사람은 독이 되고, 조언해주고 꾸짖어주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라는 말씀을 해 주셨다. 그 당시 비합리적이고 편협된 사고를 지녔던 때문인지, 잔소리를 해 주는 것이 나에 대한 관심과 사랑의 표현이라고 착각하여 관계의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또한 사람을 많이 좋아하는 성향의 나는 의지가 되는 사람에게 이상적인 부모화를 하는 과정에서 커다란 상처를 입기도 하였다.]

상담을 공부하게 되면서 그는 더욱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였습니다. 정신분석을 받는 과정 중에야 마음 속에서 살아나는 메아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아 시절에 부모로부터 들었던 ‘네가 남자였으면……’하는 소리였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해 알 수 없었던 많은 부분이 이 소리를 통해 풀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무의식에 자리하고 있던 사실을 의식하게 되면서 그는 비로소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걸음을 뗄 수 있었습니다.

상담사로 있는 상담의 현장에서도 그의 심리적 미해결 과제가 영향을 미치는 현실을 직시하고 있습니다. 관계성에 있어서도 ‘과거의 나’는 주관적인 생각과 감정으로 오류를 많이 범했다면, 지금은 ‘멈춤’작업과 ‘생각빼기’작업을 연습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그에게 가장 큰 자원은 ‘공감 능력과 감사’임을 다시 일깨우게 되면서 자기이해를 바탕으로 한 자기탐색과 분석은 끊임없이 해야 함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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